<문득-8>

순수와 유치

by 최희철

<문득-8>


순수와 유치


홍상수 영화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에서 3류 작가인 효섭(김의성)은 두 부류로부터 어려움을 겪는데, 하나는 자신에게 폭군처럼 행세하는 출판사이고 또 다른 하나는 노예처럼 자신을 좋아하는 민재(조은숙)다.


사랑의 포지션은 폭군 아니면 노예다. 영화 마지막 부분에서 효섭은 자신을 끈질기게 따라다니며 구애하는 민재를 때리기조차 한다. “네가 침대에서 곰 인형 따위를 끌어안고 자는 것은 순수가 아니라 유치(幼稚)”라는 것이다.


니체가 우정이 사랑보다 높다고 한 것도 그와 같은 이유에서였다.


‘폭군과 노예’는 모든 존재가 불평등하다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다양성이 아니라 ‘동일성’에서 출발한다. 그들은 스스로를 희생하고 있다 여기는데 반드시 ‘희생의 대가’를 요구한다.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희생의 역사는 없는데 스스로 ‘희생’을 허물어뜨리는 걸 넘어 ‘복수의 칼’처럼 작동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사랑, 폭군, 노예, 독재, 희생, 복수’ 등은 모두 ‘동일’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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