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차향저격

절제된 아름다움과 우롱차

예평, 24' 금훤

by 차잇점

선이 곧고 우아한, 내면과 외면의 절제된 아름다움을 지닌 어른이 되고 싶었다. 너무 가볍지도, 무겁지도 않게 말이다. 때론 천방지축 아이 같다가도, 나름 차분한 면모를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단 생각이 드는데 어떤 게 진짜 내 모습인진 모르겠다. 이 모습도 편하고, 저 모습도 편해서. 사실 뭐 굳이 하나로 정의해야 하나 싶기도 하고.


고유의 분위기가 잔잔한 사람이 좋다.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화려함보단 수수한, 풍성한 머리칼을 쓸어 넘겼을 때 사르르 다시 흘러내리는 느낌. 눈빛이 선하고, 생각과 행동이 올곧으며, 언어가 다정한 것. 계절로 치면 청명한 가을인데 마음은 봄 같은 사람말이다.


최근에 그런 은채청자를 만났고, 그런 은채청자에 담긴 청차를 맛보았다.




지난주, 매년 코엑스 전시홀에서 진행되는 국제차문화대전 행사에 다녀왔다. 차를 주제로 무려 22년간 진행된 국내 대규모 전시인데 나는 이번 방문이 처음이다. 차에 입문한 지 1년도 채 안된 시점에서 바라본 전시가 얼마나 설레던지 예매 티켓이 열리자마자 큐알 등록을 재차 확인하곤 했다.


그러나 모든 부스를 돌아보자 다짐했던 마음과는 다르게 붐비는 인파 속, 컨디션도 영 안 좋고 적정 체력의 한계를 느껴 다관과 숙우 구매에 신중을 가하기로 마음을 돌린다. 그렇게 여러 번 기물을 들었다 놨다, 밥도 안 먹고 꼬박 4시간 30분을 돌아다녔다.


덕분에 마음에 남는 다관과 숙우를 만났고, 계획에 없던 잔과 잎차 몇 개를 구매한 뒤 집으로 향한다. 분명 아쉬움은 계속 남았다. '조금 더 많이 시음해 볼걸..'이란 생각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런데 2주 뒤면 이사를 가야 한다. 당장 집에 무언갈 들이기보다 비워야 할 시점이다. 그래서 최대한 다양한 브랜드를 눈에 익히고, 여지만 남기고 왔다. 내년 행사 방문을 위해 1년짜리 적금을 드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



은채정차 숙우 및 잔은 모두 예라믹 아트 이예원 작가 작품이다. 작가님의 말을 빌려 전시장의 노란 조명 때문에 청자가 빛을 발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무엇인지 집에 들여놓고 보니 잘 알겠다.


실물로 보면 조금 더 청초하고 조금 더 고혹적인 아이인데, 차를 우리고 잔이 입술에 닿았을 때 촉감이 굉장히 부드럽다. 변태 같지만 이게 사실인 걸.


숙우는 뜨거운 차가 담겼을 때, 자칫 '앗 뜨거워!'를 남발할 수 있는 온도이니, 조심하는 게 좋겠다. 영 쉽지 않은 자태를 지녔기에 신비감이 감돈다. 그래서 더 매력적일 수밖에 없고.


'아 나는 이런 사람이 되고 싶었던 걸까..'



8년 전, 독립 서점과 독립 출판에 시선을 돌리던 시점. 최유수 작가 서평단에 당첨되어 친필 사인이 담긴 그 책을 닳고 닳도록 읽어 어느새 너덜너덜해졌다. 차와 함께 가벼운 마음으로 첫 페이지를 열고, 몇 문장에 의미부여를 되새기다 비장한 마음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닫았다.



서로 다른 풍경을 하나로 겹칠 때 발생하는
모든 뒤틀림에 저항하고 견디는 방법을,
기어이 포개어져 부둥켜안는 방법을,
우리는 배워야만 한다. "

그땐 그 의미가 무엇이었는지 깊이 파고들 만큼은 아니었는데 지금은 덤덤하게 읽어도 마음에 남는 걸 보면, 경험이 쌓인 증빙인가 보다. 그 증빙은 많이 아프고, 다쳐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거니까.



금훤은 복건성의 금훤 품종으로 만든 우롱차 종류 중 하나이다. 신기하게도 밀키 우롱 더하기 다디단 캐러멜 맛을 품고 있다. 포장지를 뜯자마자 기분 좋은 향이 스멀스멀 올라왔고, 차를 우리고 잔에 따르고, 한 모금 머금은 그 순간까지 행복하게 만든다. 정녕 해피 바이러스 같은 존재다.


사실 처음엔 금훤이 아닌 백차를 꺼내 들었다. 날이 덥기도 하고, 청자 색감을 그대로 살려줄 아이를 찾고 있었는데 생각해 보니 세로로 잔이 긴 것을 보아 단향을 내뿜는 우롱차가 제격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잔이 길수록 향미를 더 품을 수 있어, 꽃향을 머금은 우롱차와 정말 잘 어울리기 때문이다. 기물과 차를 페어링 했을 때 '이런 사람이 되어야지.'란 교훈도 함께 얻었으니 근래 들어 가장 마음에 드는 조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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