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재명차, 녹차 우전
따뜻한 봄에서 초 여름으로 넘어갈 무렵, 혹은 무더운 여름에서 청명한 가을로 넘어가는 그 찰나의 계절엔 항상 반갑지 않은 친구가 찾아온다. 그 녀석의 이름은 바로 환절기 알레르기인데 어릴 적부터 줄곧 천식과 비염을 달고 살았던 나. 다행히 성인이 되면서 천식은 서서히 사라졌지만 지독한 비염은 오랜 벗도 아닌데 '안녕 나야'하고 불쑥 찾아와선 꼬박 일주일을 괴롭히다 '다음에 또 올게'라며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다. 참으로 얄밉기 짝이 없는 녀석이다.
다 큰 성인이 출근 지하철에서 10초 간격으로 코를 훌쩍이다 본체의 의도와는 다르게 콧물이 줄줄 흐르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영 우스꽝스럽기도 하고 동시에 코를 자주 풀어 머리는 띵하고, 눈은 따갑고, 코 주변이 헐어있어 이 익숙한 과정을 매번 환절기 때마다 겪다 보니 얼마나 스트레스인지 모른다.
그리고 다시 5월, 기어코 불청객의 계절이 찾아왔다. 밥은 먹어야겠는데 맛은 안 느껴지고 자연스레 입맛이 사라질 때쯤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는 찰나의 틈, 5월 초 햇차 시즌을 맞이하여 구비해 둔 우전 녹차와 냉동실 어딘가에 꽁꽁 숨어있는 명란이 떠오른 것이다.
" 아, 명란 오차즈케를 만들어 먹자. "
준비물은 매우 간단한다. 꼭 녹차잎이 아닌 시중에 판매하고 있는 녹차 티백이어도 상관없다. 티백 사용 시, 국물용으로 우릴 티백 1개를 준비하고, 그릇에 밥과 후리가케, 구운 명란이나 고등어 혹은 선호하는 메인 메뉴 순으로 쌓아 올려준 뒤 약 75~80도의 뜨거운 물로 녹찻물을 우리고 세팅된 그릇에 살살 부어준다.
녹차물의 간은 쯔유나 약간의 참치액과 진간장을 넣어도 좋지만, 후리가케와 명란 만으로도 어느 정도 간이 맞춰 있어 기호에 맞게, 본인 취향껏 제조하거나 생략해도 무방하다.
나는 코가 막혀 참치액과 진간장을 살짝 넣었는데 국물만 마셨을 땐 맞춤형이었으나, 밥과 명란을 함께 곁들여 먹으니 너무 짜서 살짝 후회했다는 점. 다음엔 간을 생략하고 본연의 맛에 집중해 보려고 한다.
티백이 아닌 녹차잎을 사용했을 경우, 식후에 마실 차까지 우린 뒤에 남은 엽저를 밥 위에 숑숑 올려 세팅해 주면 육안으로 보기에도 좋지만 식감도 정말 훌륭하다.
녹차잎으로 활용 가능한 건강한 레시피가 많아 이후에도 조금씩 찾아보고, 만들어봐야겠다.
든든한 한 끼 식사를 마치고 우전 본연의 맛과 향을 가득 느끼다 보니 본격 여름이 오기 전, 진짜 마지막 봄이 가는구나를 실감한다. 무더운 여름이었다가 대뜸 비가 내리고, 긴 팔을 꺼내 입는 둥 변화무쌍한 날씨처럼 굳건했던 내 마음도 때론 소란스러웠다가 이내 잔잔해지길 반복하는 걸 보면 어떤 결심도 영원하진 못 하나보다.
요즘 느끼는 건, 내 하루가 온종일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보다 '그런가 보다.'하고 무던해지길 바란다. 두고두고 남기고 싶은 특정 감정이라면 사진을 찍고, 글로 적어 오래도록 기억하되 부정의 감정은 무심히 흘려보낼 줄 아는 것. 그저 많은 것에 연연하지 않는 것.
한두어 달 전의 감정이 지금은 아무렇지 않은 걸 보면 그렇게 분노할 일도 아니었는데 말이다.
곡우 전에 채엽한 어린잎을 덖어 만든 녹차 우전은, 쌉싸름함보다 구수한 단맛의 여지를 남기고 마치 환절기 알레르기처럼 다음을 기약하지만 내년에 또다시 찾아올 불청객이 나를 괴롭힐 때면 지독한 계절로 기억하기보단 '우전의 계절이 찾아 왔구나'라며 이제는 조금 반갑게 맞이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