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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아로chaaro Oct 28. 2022

욕을 시작하지 말걸

새는 바가지가 되어버린 후회

1.

욕도 담배와 같다. 처음부터 아예 시작을 하지 말았어야 했다. ‘금연’이라는 것은 담배를 ‘끊는 것’이 아니라 ‘평생에 걸쳐 참는 것’이라는 자조적인 말이 있던데, 욕도 그런 것 같다. 한번 맛 들인 욕은 끊는 것이 아니라 입 밖으로 나오지 않게 틀어막는 것이 전부다.  


이를테면 이런 것이다. 무례한 태도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는 고객을 상대하느라 진을 빼고 있노라면 속으로 ‘ㅅㅂ, 개짜증 나네.’라는 생각이 나도 모르게 떠오른다. 물론 나는 멀쩡한 사회인이므로 저런 욕을 입 밖으로 내보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속으로나마 저런 상스러운 욕을 자연스럽게 하는 인간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이제는 분노나 짜증 같이 부정적인 감정이 일어나면 내 의지와 상관없이 욕이 반사적으로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미 욕을 알아버린 나의 뇌가 자동으로 그 욕을 머릿속에서 재생해 버린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욕이 입 밖으로 음성화 되어 나오지 않도록 검열하는 것뿐이다. 이제는 욕을 모르던 나로 돌아가는 것이 불가능한 것 같다. 


2.

내 인생에 첫 욕을 언제 입 밖으로 뱉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하지만 가장 공들여서 욕을 하던 시기가 중학교 무렵이라는 것은 확실히 기억이 난다. 내 동생이 “언니는 착하게 생겨서 딱 보면 만만해 보이는데, 욕을 하면 어설퍼서 더 만만해.”라고 얘기했던 것이 생생하게 기억나기 때문이다. 그때 나는 동생의 이야기를 듣고 만만해 보이지 않도록 더 열심히, 그리고 맛깔나게 욕을 하려고 노력했었다. 물론 당시의 내 친구들이 전부 욕을 했다는 사실도 ‘또래 압력’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어린 중학생의 입에서 19금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심한 욕설이 나오는 것을 보고 어른들은 기함하지만, 오히려 뭘 모르는 그때가 더 거칠 것이 없는 시절이다. 사실 중학생 시절을 지나 고등학생만 되어도 상스러운 욕을 하는 모습이 별로 좋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심한 욕설을 습관처럼 내뱉는 사람이 카리스마 있는 리더처럼 보이는 것이 아니라 엮이기 싫은 양아치처럼 느껴진다는 사실도 말이다.



3.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어느 정도 욕은 할 줄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험난한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욕 할 일이 부지기수일 텐데 그러한 상황에서도 욕 한 마디 못하는 나약한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무례한 ‘욕 유발자’들에게 대항하기 위한 방어 차원에서 어느 정도 욕 실력은 무기처럼 갖추어야 한다고 믿었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도 무기 점검은 게을리하지 말아야 하는 것처럼 말이다.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정말로 욕을 육성으로 뱉어야 할 때에는 반드시 찰진 욕을 하겠다고 다짐했다.

 

물론 평소에는 절대로 욕을 입 밖으로 내지 않는다. 나는 훌륭하게 사회화된 멀쩡한 일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없는 자리에서는 나라님도 욕하는 것이 보편이다. 그런 고로 속으로 하는 욕은 하등 문제가 될 것 없는 건전한 행동이라고 생각했다. 



4.

그리고 이런 생각은 매우 사소한 계기로 바뀌었다. 우연히 켠 TV에서 김영하 작가의 일화를 들은 것이 그 계기이다. 김영하 작가는 학생들에게 ‘짜증 나다’라는 말을 금지시켰는데, 그 이유가 ‘서운하다’, ‘황당하다’, ‘화나다’ 등의 다양한 감정을 ‘짜증 나다’라는 표현 하나로 뭉뚱그리게 되기 때문이라고 했다. ‘짜증이 난다’며 두루뭉술하게 표현하고 끝낼 것이 아니라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관찰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고 과연 나는 감정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고 있는지 무심코 돌아보았다. 그리고  의외의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내가 느끼는 거의 모든 감정 앞에 ‘존나’를 붙여 생각한다는 사실이다. ‘존나 어이없다’, ‘존나 짜증 난다’, ‘존나 행복하다’. 딱히 강한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존나’라는 표현 쓰는 것도 아니었다. 나의 뇌는 아주 약간 어이없는 상황에서조차 “존나 어이없네?”라며 그저 습관적으로 ’존나‘를 붙이고 있었다. 



5.

나는 그때에서야 문제가 얼마나 심각한지 파악했다. 그리고 내 문장 속에서 최대한 ‘존나’를 빼려 노력해 보았다. ‘존나 어이없다’ 대신에 ‘참 어이없다’를 떠올리려고 노력했다. ‘존나 짜증난다’는 ‘매우 짜증난다’로 바꾸었다. ‘존나 행복하네’ 대신에 ‘무척 행복하다’라고 생각해 보려 했다. 그런데 잘 되지 않았다. 너무 어색하다. 무언가 꼭 있어야 할 것이 없는 것처럼 허전하고 심심하다. 아아. 나는 이제 ‘존나’라는 상스러운 말이 없으면 허전한 지경이 된 것이다. 


이제는 내가 타락했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나는 ‘존나’라는 저질스러운 언어가 아무런 자극이 되지 못하는 지경으로 타락했다. 속으로만 하는 욕은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욕은 습관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습관이 된 욕은 어느새 나의 어휘를 저질스럽게 장악하고 있었던 것이다.



6. 

애당초 욕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무심코 시작한 담배가 폐를 망가뜨리듯, 무심코 시작한 욕은 내 생각의 질을 떨어뜨리고 있었다.


가수 이진아 씨는 태어나서 욕을 해 본 적이 없다고 한다. 예전 같았으면 고리타분하고 답답한 사람임이 분명하다며 비죽거렸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이진아 씨가 너무 부럽다. 속으로도 욕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얼마나 정갈한 언어로 감정을 표현할까. 그들이 발산하는 욕이 배제된 분노는 결코 상스럽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상스럽지 않은 분노는 함부로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견고할 것이다. 양아치가 뱉는 가래침같이 욕지거리로 뱉어버리는 저질 분노와는 질적으로 다를 것이다. 


어디 그뿐인가. 그들은 나처럼 ‘행여나 실수로 머릿속에 즐비한 상스러운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까 봐’ 혹은 ‘나의 아기가 내가 무심코 한 상스러운 혼잣말을 배워 따라 할까 봐’ 긴장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7.

나도 이진아 씨처럼 그랬어야 했다. 욕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 험한 욕을 주고받으며 그게 대단한 힘인 것인 양 으스댔던 중학생 시절이 나는 너무 후회스럽다. 


나는 이미 줄줄 새는 바가지가 되었다. 비록 안에서는 새지만 원활한 사회생활을 위해서 밖에서는 새지 않도록, 필사적으로 바가지에 난 구멍을 막으며 살아가고 있다. 처음부터 바가지에 구멍을 내지 않았으면 좋았을 걸. 얼마 전 청소년을 대상으로 노담(No 담배) 캠페인이라는 것을 하는 것을 보았다. 정말이지 내 청소년기로 돌아가서 노욕(No 욕) 캠페인이라도 펼치고 싶은 심정이다. 





+후회 그 후...

이미 욕에 푹 절여진 뇌가 되었지만 이제라도 정화하려고 노력하는 중이다. 끊기 힘들다는 담배조차도 10년 정도 피우지 않으면 참기가 훨씬 더 수월해진다고 하더라. 나도 계속 노력하다 보면 10년 후에는 욕을 전혀 떠올리지 않으며 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다. 정말 나쁜 사람을 보았을 때에도 ‘나쁜 새끼’나 ‘감방에 쳐 넣어야 돼!’라는 상스러운 단어 대신에 ‘나쁜 인간’, ‘치도곤을 먹일 인간 같으니’같이 지상파 방송이 가능한 단어만 떠오르는 경지가 나의 최종 목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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