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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아로chaaro Oct 28. 2022

싸이월드와 일찍 이별할걸

첫사랑과의 구질구질한 이별

1.

만약 집에 불이 났는데 
단 한 가지 물건만 가지고 나올 수 있다면 
무엇을 가지고 나오겠는가? 


식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살면서 한 번 정도는 생각해 봄 직한 질문이다. 사람에 따라 여러 가지 대답이 나올 수 있겠지만 크게 두 부류로 갈릴 것 같다. '이성적인' 그리고 '감성적인’.

이성적인 대답을 하는 사람은 화재로 인한 경제적 손실을 최대한 보전할 수 있도록 돈이나 보석 같이 값어치가 나가는 물건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감성적인 대답을 하는 사람들은 경제적 가치는 낮더라도 나에게 정서적인 가치가 높은 물건을 선택할 것이다. 사진이나 편지,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은 선물 같은 것 말이다. 



2. 

나는 당연히 후자다. 기왕 식상한 질문을 한 김에 대답도 식상하게 해 보면, 나의 경우 ‘어렸을 때 사진이 담긴 앨범’을 가지고 나올 것이다. 기왕 식상한 질문과 식상한 대답까지 하였으니 왜 그러한 선택을 했는지 이유도 식상하게 설명하자면, ‘돈은 또 벌면 되지만 추억은 돈으로도 살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앨범이란 그 추억의 실화요 실체요 매개체이다. 지금이야 사진이 대부분 디지털화되어 있으니, 클라우드 같은 매체에 백업을 해 놓으면 안전하겠지만, 내가 어렸을 적에 사진이란 ‘필름을 현상한 종이’를 의미했다. 집요한 성격을 가진 나였다면 사진뿐만 아니라 필름도 악착같이 보관해 놓았을 테지만 우리 부모님께서는 그러지 않으셨다. 고로 내 어릴 때 추억들은 필름도 없이 가녀린 종이의 형태로 덩그러니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니 이 얼마나 소중한가.



3.

물론 지금은 저렇게 연약한 인화지 한 장에 추억을 내맡기지 않아도 된다. 디지털카메라가 보편화되고, 핸드폰으로 찍는 사진의 퀄리티가 좋아짐에 따라서 고화질의 사진을 손가락만 한 USB에 넣어놓을 수 있으니 말이다. 그마저도 불안하면 손바닥만 한 외장하드에 추가로 백업을 해 놓으면 되고, 그 조차도 불안하면 클라우드에 이중 삼중으로 백업을 해 놓으면 된다. 



4.

문제는 역시 격동의 200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2000년대는 필름 카메라에서 디지털카메라로 넘어가는 과도기였다. 필름값을 들이지 않고 마음껏 고화질의 사진을 찍을 수 디지털카메라가 보편화되기 시작했다. 필름 카메라처럼 공들여 포즈를 취하고 한 장 한 장 정성스럽게 사진을 찍을 필요도 없었다. 당시의 키워드였던 ‘엽기’라는 단어대로, 우스꽝스러운 일상 사진을 마구 찍어댔다. 그리고 그렇게 찍은 사진은 모두 <싸이월드>로 넘어가 안착했다. 



5. 

그 당시 싸이월드의 위세는 어마어마했다. 지금 핸드폰 번호를 물어보듯이 당연하게 싸이월드 미니홈피 주소를 주고받았다. 그 당시 ‘도토리’라고 하면 ‘떡갈나무의 열매’인 도토리가 아니라 ‘싸이월드의 화폐 단위’인 도토리 먼저 연상될 정도였으니, 싸이월드는 이름 그대로 또 다른 국가였다. 도토리라는 그들만의 화폐가 있었고, ‘일촌’이라는 그들만의 인맥이 있었다. 게다가 본인의 ‘아바타’와 그 아바타가 거주하는 공간인 ‘미니룸’도 있었다. 어찌 보면 SNS라는 개념도 생소하던 시절에 메타버스를 구축한 셈이다.



6. 

이렇게 굳건한 싸이월드였기에 나는 나의 사진을 싸이월드에 올리고 나의 일상을 싸이월드에 기록했다. 싸이월드는 사실상 나의 일기장이었다. 나는 추억하고 싶은 이벤트가 생길 때마다 사진을 곁들인 일기를 싸이월드에 업로드했다. 그리고 떠올리고 싶을 때마다 싸이월드에 접속해서 사진과 기록을 보며 추억을 만끽했다. 


그 사이 하버드의 마크 저커버그 씨가 페이스북을 만들었다. 그리고 네이버는 파워블로거를 선정해서 블로그를 운영하는 블로거에게 ‘파워’를 주었다. 하지만 나는 본디 의리가 충만한 인간이어서 한 번 정을 주면 잘 배신하지 않는다. 비록 싸이월드에 글을 쓰면 네이버 블로그처럼 ‘파워’를 얻을 수 없지만, 나는 파워를 포기하고 추억을 지키기로 했다. 많은 사람들이 외국인 친구들과 소통할 수 있는 페이스북으로 옮겨 갔을 때에도 나는 흥선대원군처럼 싸이월드를 지켰다. 하지만 어느새 싸이월드는 황량해지고 교류할 수 있는 일촌이 없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추억이 이렇게나 많은 싸이월드를 배신할 수는 없었다.



7.

그런데 싸이월드가 변했다. 변하더니 떠났다. 떠나더니 완전 다른 모습으로 돌아왔다. 오랜동안 사귀던 애인이 갑자기 변하면 누구라도 당황하기 마련이지만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그 변화도 포용할 수 있는 법이다. 하지만 그 변화가 바람이나 도박, 폭력과 같이 포용하기 힘든 변화라면 헤어지는 것이 낫다. 나에게는 싸이월드의 변화가 그랬다. UI가 바뀌거나, 미니홈피가 없어지는 것쯤은 얼마든지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런데 코드에서 무언가 에러가 났는지,  내 일기장의 사진이 엉망으로 삽입되어 있었다. 몇몇 사진은 깨져서 보이 지를 않았다. 엉뚱한 곳에 엉뚱한 사진이 삽입되어 있어서 읽기 힘들 정도로 뒤죽박죽이 되었다. 


변한 애인을 되돌리려는 노력을 해 보지 않은 것은 아니다. 나로서는 크나큰 용기를 내어 싸이월드 고객 센터에 메일을 보냈다. 하지만 형식적인 답변이 왔고, 문제는 하나도 해결되지 않았다. 그때의 고객센터는 싸이월드의 시그니처 UI였던 ‘미니홈피’가 없어진 것에 대한 분노로 가득 찬 민중들을 응대하는 것만으로도 바빠 보였다. 



8. 

나는 미련 없이 싸이월드를 정리했다. 다행히도 사진첩은 쉽게 백업이 가능했지만, 대부분 나의 추억은 ‘다이어리’ 카테고리에 일기 형식으로 있었다. 깨지고 엉뚱한 사진이 삽입되어 있는, 만신창이가 된 나의 일기장을 하나하나 드래그해서 복사했다. 나에게 써 주었던 일촌평도, 친구들의 댓글도 전부 드래그해서 복사했다. 너무 많아서 복사-붙여 넣기 하는 데에도 몇 날 며칠이 걸렸다. 사실 이렇게 복사-붙여 넣기 해서 간신히 옮겨온 나의 일기들은 나중에 하나하나 읽으면서 복원해야 제대로 읽을 수 있다. 양이 방대해서 은퇴 후 노년에나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도 은퇴 후 젊은 날을 추억할 수 있는 소일거리가 하나 생겼으니, 옛 애인이 좋은 선물 하나 준 셈이라며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한다. 



9.

난 왜 싸이월드가 없어질 것이라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을까. 엠파스도 없어지고 라이코스도 없어졌는데 왜 싸이월드 만은 건재할 것이라고 생각했을까. 아마 싸이월드라는 왕국이 너무 거대해서, 이렇게 몰락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 같다. 


가끔씩 신변잡기 종류의 글이 몇천 개씩 있는 블로그들을 보면 부럽고 씁쓸하다. 싸이월드가 건재했다면, 나도 저런 글들이 몇천 개는 쌓여 있을 것이라는 미련이 든다. 아니면 차라리 싸이월드의 인기가 떨어지기 시작할 무렵에라도 재빠르게 다른 플랫폼으로 갈아탔어야 했다는 후회도 들고 말이다. 




+후회 그 후... 

나는 첫사랑에 호되게 데어서 연애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싸이월드 이후로 어떠한 SNS에도 깊이 빠지지 못하고 있다. 카카오스토리도, 페이스북도, 인스타그램도, 언젠가는 싸이월드처럼 내 추억을 가지고 변해 버릴 것만 같아서, SNS에 힘을 빼지 않는다. 싸이월드 덕분에 SNS에 지나치게 몰입해서 생기는 카·페·인 우울증(카카오스토리·페이스북·인스타그램으로 생기는 우울증) 같은 것은 생기지 않으니 내 첫사랑의 경험도 나쁘지만은 않다. 안녕 내 첫 SNS 싸이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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