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개구리를 내일로 미루는 능력(2)
지난 글 (개구리란 무엇인가.)
나는 늦은 나이에 첫 회사에 들어갔다. 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 휴학도 했고, 학점이 부족해서 졸업도 제때 못 했다. 그런 주제에 대학원에 입학했다. 학비가 거의 들지 않는 이공계 대학원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애당초 엄청난 포부를 가지고 대학원에 간 것도 아니었으니 그렇고 그런 대학원 생활을 했다. 인생의 목표가 ‘박사를 따는 것’과 ‘졸업하는 것’, 이 두 개로 압축되었다. 실제로 적지 않은 대학원생의 목표가 오직 ‘졸업’이다. 이해하기 어려울 것도 없다. 고3의 목표는 대학에 입학하는 것이고, 취준생의 목표는 취업인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나 역시 졸업만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갔고, 마침내 내 이름 앞에 그럴듯한 박사 타이틀을 달았다.
졸업과 동시에 나는 고학력 백수가 되었다. 그리고 나의 백수 기간은 생각보다 길어졌다. 딱히 위기감은 없었다. 조바심이 들지도 않았다. 원래 인생은 계획한 대로만 풀리지는 않는 법이고, 그건 내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나는 진심으로 괜찮았다. 그런데 박사학위를 대수로이 생각하는 내 주변인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고생해서 박사가 되었는데 백수가 가당하냐며 나를 괴롭혔다. 마침 고학력 백수를 보다 못한 선배 하나가 본인 회사에 지원해 보라고 권유했다.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에 휘뚜루마뚜루 지원서를 냈다가 덜컥 합격해 버렸다. 의외로 힘을 빼고 한 일이 잘 풀리기도 하는가 보다. 나는 적지 않은 나이가 되어서야 처음으로 회사라는 데 들어갔다.
회사에 있는 일은 대부분 재미가 없었다. 한 마디로 삼키기 싫은 개구리였다는 말. 일하는 것이 재미있다는 사람도 간혹 있겠지만 나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애당초 학계에서 밀려난 패잔병의 심정으로 온 곳이니 더더욱 그랬다.
그래도 일은 열심히 했다. 공부를 잘했다는 것이 그 사람의 능력을 보장해주지는 않지만 성실성은 어느 정도 보장해 준다고 믿는다. 지금은 아닐 수도 있는데 라떼는 그랬다. 라떼는 몰아치는 대한민국의 교육 시스템에서 성실하게 버틴 자만이 공부를 잘할 수 있었다. 이렇게 사는 것이 옳은가 그른가는 전혀 사유하지 않은 채 까라면 까는 성실함이니 딱히 자랑스러울 것은 없다. 그렇다고 부끄럽지도 않다. 사실 까라면 열심히 까는 성실함은 회사라는 곳이 선호할 덕목이기도 하다. 아무튼 나는 그랬다. 회사에 들어가서도 나는 참으로 성실하게 눈앞에 있는 개구리를 꾸역꾸역 먹어치웠다.
그런데 이상했다. 아무리 개구리를 먹어치워도 평안은 찾아오지 않았다. 원래대로라면 개구리를 먹어 치운 후에는 일말의 성취감과 함께 홀가분한 평안이 찾아왔어야 했는데 그렇지 않았다. 이 일을 끝내면 저 일이, 저 일을 끝나면 또 다른 일이 생겼다. 어디서 나오는지 개구리는 게임 속 몬스터처럼 계속 등장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회사라는 곳은 나의 전략, 즉 개구리를 빠르게 먹어치우고 자유로워진다는 방법이 통하지 않는 곳이구나. 왜 그럴까? 나는 곰곰이 생각했고 세 가지 정도의 이유를 찾아냈다.
첫째, 회사는 개구리를 빨리 먹어치우는 사람에게 또 다른 개구리를 던져 줄 뿐이다. 당연하다. 노동자에게 쉬이 휴식을 허락하는 회사가 어디 있겠는가. 이 일을 끝내면 또 다른 일을 기다렸다는 듯이 던져 주는 곳이 회사다. 그러다 보니 일을 빨리 끝내는 소위 일잘러에게 일이 몰리게 된다. 결코 일을 빨리 끝낼 필요가 없다.
특히 회사라는 곳은 누가 해야 하는 일인지 불분명한 일이 많은 곳이다. 이건 김 과장이 해야 하는 일, 이건 이대리가 해야 하는 일. 이렇게 업무에 이름표가 붙어있으면 좋으련만. 이름표 없는 일은 손 빠르게 일을 끝낸 일잘러에게 배당되기 마련이다.
물론, 하나라도 더 배우고 싶은 사람이라면 기꺼이 개구리를 먹어치울 것이다. 이런 것도 다 실력을 키우기 위해 배우는 과정이라고 생각하고 감사한 마음으로 감내할 것이다. 야망가도 그렇다. 높으신 분들에게 핵심 인재로 각인되어 빠르게 승진하려는 야망이 있는 사람이라면 기꺼이 개구리를 먹어치울 것이다. 특히 징그럽고 삼키기 힘든 개구리를 남들 보는 앞에서 누구보다 멋지게 먹어치우며 본인의 능력을 어필하겠지.
하지만 오직 밥벌이만을 위해 입사했고, 일명 승진 포기자인 나에게는 둘 다 해당되지 않는 일이다. 그러므로 나는 구태여 허겁지겁 개구리를 먹어치울 필요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두 번째 이유는 회사는 굳이 할 필요 없는 일도 일단은 시키고 본다는 점이다. 먹어 치울 필요가 없는 개구리도 “일단은” 먹으라고 준다. 그래서인지 대충 시간 좀 끌며 버티다 보면 흐지부지 되는 일들이 부지기수다. 애당초 할 필요가 없었던 일들. 그 일을 시킨 사람도 까먹고 있던 일들. 모른 척 뭉개고 있으면 원래부터 없던 일이 되는 일들.
나는 이미 다 했는데 갑자기 추진 방향이 바뀌었다고 안 해도 된다는 통보를 받는 일이 반복되니 허탈했다. 알고 보니 짬 있는 선배들은 뭔가 미심쩍은 일이면 최대한 미루고 시작조차 안 했더라. 순진하게 미리 일한 나반 바보였다. 이런 식으로 먹을 필요 없는 개구리를 몇 번 먹고 나니 나도 좀 미심쩍은 개구리는 최대한 안 먹고 버티게 되었다. 옆에서 거슬리게 개굴개굴 울어도, 사라질 것 같은 일은 최대한 안 하고 버텼다.
세 번째 이유. (이 부분이 가장 중요하다) 개구리를 빨리 먹어치우는 것과 월급, 인사고과와는 상관이 없다는 점이다. 사실 월급은 그렇다 치고 고과에도 반영에 되지 못한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의아하긴 하다. 하지만 회사의 고과라는 것은 생각보다 복잡한 이해관계가 얽혀있기도 하다. 누군가 A를 받으려면 누군가는 C를 받아야 하는 비정한 체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누가 개구리를 제일 많이 먹어치웠냐 보다는 ‘우리 팀에서 올해 승진해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두 번이나 승진에서 누락돼서 이번에야말로 꼭 승진해야 하는 사람이 누구인지’가 고과에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사실 고과를 잘 주고 싶은 사람에게는 초반부터 셀링 하기 좋은, 즉 일한 티가 팍팍 나는 프로젝트를 맡긴다. 사실상 프로젝트를 배분하는 그 순간부터 고과가 정해져 있던 있던 셈이다.
일면 억울하지만 생각해 보면 그렇게 억울한 일도 아니다. 주요 프로젝트를 맡으면 그만큼 일을 많이 하게 되니까. 그리고 주요 프로젝트를 맡았다는 사실 자체기 능력이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아닌 경우도 있지만. 아무튼.) 그리고 그들 역시 승진 대상자를 고려해 주는 과거 악습의 피해자였을 가능성이 크므로, 기다린 보상을 이제야 받는다는 측면에서는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하지만 만약 승진대상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주요 프로젝트를 맡지 못했다면? ‘영혼을 갈아 넣어 열심히‘ 일을 하든 ’ 욕먹지 않을 정도로 무난하게 ‘ 일을 하든 어차피 고과는 B정도로 고정되어 있다면? 회사에는 미안하지만(사실 미안하지 않다.) 구태여 열심히 일을 열심히 하고 싶지 않다.
내가 특별히 약아빠지고 못된 인간이어서가 아니다. 적절한 보상이 없는데 좋아하지도 않는 일을 무리해서 하는 인간은 드물다. 예전이야 평생직장이라는 개념이 있었으니 회사에 대한 ‘충성심’ 때문이라도 몸과 마음을 바쳤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평생직장은커녕 투잡, 쓰리잡이 성행하는 시대다. 회사라는 곳은 더 이상 유일한 밥벌이가 아니라 그저 여러 밥벌이 중 하나일 뿐이다. 그나마도 평생이 아니라 그저 거쳐가는 밥벌이일 뿐이라는 것이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내가 취해야 할 태도는 명확해졌다. 나는 오늘의 개구리를 최대한 내일로 미루기로 했다. 오지 않을 평안을 기대하며 허겁지겁 개구리를 해치우지 않기로 했다. 물론 더 이상 먹기 싫은 개구리를 체하도록 꾸역꾸역 먹지도 않기로 했다.
지금까지 매사 빠릿빠릿하게 일을 처리해 온 나에게 이건 힘든 일이다. 천성이 성실한 나에게는 ”열심히 일하지 않는 것“, ”할 일을 기약 없이 미루는 것“ 자체가 괴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옆에서 시끄럽게 울고 있는 개구리를 애써 무시하기란 쉽지 않다. 결국 정신을 차려보면 나도 모르게 또 일개미처럼 꾸역꾸역 열심히 일을 하고 있다. 동료가 나를 두고 ‘근로자 측이 아니라 마치 사측 같다 “고 표현할 정도로 말이다.
게으를 수 있는 것도 능력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러므로 이 글은 다짐하기 위한 글이다. 앞으로는 적당히만 일하겠다는 다짐 말이다. 월급 받는 만큼만, 남에게 폐 끼치지 않을 정도로만 무난하게 일 하자. 그래서 더 이상 내 인생이 회사일에 소진되지 않도록 하자.
잊지 말자.
개구리는 쌀알같이 많고,
저 개구리를 내가 꼭 먹어야 할 필요는 없으며
아무리 개구리를 많이/빨리 먹어도 평안은 찾아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