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의 민주화?
'사용자 주도(user-driven)' 혁신은 리빙랩 혁신활동의 특성이자 개방형 혁신모델과 함께 리빙랩을 정의하는 개념 중 하나이다. 참여적 디자인 전통 역시 사용자 참여를 강조하지만, 전통적인 혁신 시스템 내에서의 사용자 참여 패러다임은 '혁신의 민주화'를 주창한 에릭 본 히펠(Eric von Hippel)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볼 수 있다(Von Hippel, 2006). 그는 산업혁신 과정에서 개발자가 사용자의 니즈를 이해하고 반영하여 사용가치가 있는 제품을 만들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리빙랩을 소개하는 다수의 문헌들은 이러한 본 히펠의 논의에 기반해 리빙랩에서의 사용자 주도 혁신을 설명한다(Følstad, 2008; Eriksson et al, 2006; Dell'Era & Landon, 2014; Ballon & Schuurman, 2015). 그렇다면, 그는 왜 이러한 혁신 시스템의 변화를 '혁신의 민주화'로 불렀을까? 그거 말하는 '혁신의 민주화'란 무엇일까?
기존의 산업혁신 시스템에서 혁신의 주체는 개발자였다. 사용자는 개발된 제품의 가이드라인에 따라 행동하도록 유도되었고, 따라서 제품의 오류는 사용자가 제품을 잘 몰라서, 잘 사용하지 못해서 일어난 문제로 귀결되었다. 즉, 제품/서비스의 개발에 있어서 사용자는 수동적 대상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본 히펠이 실제 혁신의 원천을 탐구해보니 거기에는 "사용자"가 있었다. 사용자-혁신가(users-innovators)들은 기존의 제품을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변형 및 개선해 활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소프트웨어의 발전은 이를 촉진시키는 분명한 전환점이었다. 오픈소스 프로젝트가 대표적 예이다. 인터넷의 발전이 정보의 비대칭성을 개선했다면 소프트웨어 기술의 발전은 데이터를 개방하여 누구나 혁신에 가까워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특히 시민들은 오픈소스 운동을 통해 혁신의 주체가 되기도 했는데, 코로나 19 당시 공적마스크 앱을 직접 개발한 시빅해킹(civic hacking) 사례가 이에 해당한다.
이렇듯 사용자 주도의 혁신이 지니는 잠재력이 점차 지배적인 산업혁신 시스템에 균열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이로 인해 생산자 중심에서 사용자 중심으로 혁신의 추가 움직이며 개발자에 의해 구조화된 제품설계와 논리 내에 사용자가 구속되는 것이 아닌, 그것을 우회하여 제품의 변형을 일으키고 전복하여 아예 새로운 제품을 개발하는 일련의 변화들이 곧 '혁신의 민주화'가 일어났다. 사용자 주도의 혁신은 전문성의 영역이 공인된 지식과 기술에서 "경험"으로 확장된 결과이기도 하다. 다른 말로 하면, 혁신의 권력이 분산된 것이다.
그러나 이를 '혁신의 민주화'라고 볼 수 있는가? 본 히펠은 사용자 주도의 혁신이 불러온 혁신환경의 변화를 민주화라는 개념으로 명명하지만, 실제 그는 사용자 주도의 혁신이 불러오는 경제적 가치에 주목한다. 많은 기업과 혁신연구자들 역시 그러하다. 결국 사용자 주도의 혁신이 왜 필요한가? 라는 질문을 던져보면, 그것이 경제적으로 기업에게도 이익이기 때문이다.
“혁신을 이루기 위한 역량과 정보는 한 곳에 집중되어 있지 않고 널리 퍼져 있다. 혁신을 지원하는 자원을 미리 선택된 몇몇의 혁신가들에게 집중시키는 전통적인 방식은 아주 비효율적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중략)... 자원의 가격이 큰 폭으로 낮아지면 누구나 이런 자원에 쉽게 접근할 수 있기 때문에 (자원) 할당의 필요성이 줄어든다. 결과적으로 창의와 혁신을 위한 기회가 ‘민주화’ 된다고 할 수 있다.” (폰 히펠, 2012: 241)
그에게 민주화라는 정치적 현상은 사용자 주도 혁신이라는 새로운 경제활동의 산물에 가깝다. 따라서 그 과정에서 발생하는 이익과 권력의 분배, 포용과 배제의 문제들에 대해 고려하지 않는다. 그에게 혁신의 민주화는 효울성이라는 가치에 기반해 설명될 뿐이다.
그렇다면 리빙랩은 어떠한가? 사용자 주도 혁신 모델로서 리빙랩은 혁신의 민주화를 폰 히펠과 같이 효율성이라는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 사용자 주도 혁신이 불러올 경제적 가치에 집중하고 있지는 않은가? 리빙랩은 사용자 주도의 혁신 과정에서 이익과 권력, 포용과 배제의 문제들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 이러한 질문들은 던져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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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lon, P., & Schuurman, D. (2015). Living labs: concepts, tools and cases. info, 17(4).
Eriksson, M., Niitamo, V. P., Kulkki, S., & Hribernik, K. A. (2006, June). Living labs as a multi-contextual R&D methodology. In 2006 IEEE international technology management conference (ICE) (pp. 1-8). IEEE.
Dell'Era, C., & Landoni, P. (2014). Living Lab: A methodology between user‐centred design and participatory design. Creativity and innovation management, 23(2), 137-154.
Følstad, A. (2008). Living labs for innovation and development of information and communication technology: A literature review. eJOV: The Electronic Journal for Virtual Organization & Networks, 10
Von Hippel, E. (2006). Democratizing innovation. Cambridge, MA: MIT Press. (에릭 폰 히펠, 2012, 『소셜 이노베이션: 소비자의 아이디어를 훔치는 혁신전략』, 디플Biz)