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리빙랩의 정치적 뿌리를 찾아서

스칸디나비아의 참여적 디자인 전통과 리빙랩

by 게으른대학원생

유럽리빙랩네트워크(ENoLL)은 리빙랩을 “실생활 공동체와 환경 속에서 체계적 공동창조와 통합적 연구·혁신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용자 중심의 개방형 혁신 생태계”로 정의한다(ENoLL, 2025). 이 정의에서 리빙랩의 핵심 특성인 실생활(real-life), 공동창조(co-creation), 사용자 중심(user-centered), 개방형 혁신(open innovation)을 확인할 수 있다. 이 가운데 ‘사용자 중심’은 리빙랩의 참여적 성격을 잘 드러내며, 리빙랩의 사회적 가치를 실현하는 핵심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실생활 실험’으로서의 리빙랩이 MIT 공대 윌리엄 미첼 교수 연구팀의 ICT 실험에서 출발했다면, ‘사용자 중심 접근법’으로서의 기원은 1960~70년대 스칸디나비아의 참여적 디자인(Scandinavian approaches to participatory design)에 있다. ENoLL 역시 리빙랩의 역사적 뿌리를 참여적 디자인에서 찾는다(ENoLL, 2025). 그러나 리빙랩과 스칸디나비아의 참여적 디자인 전통을 직접적으로 연결해 논의하는 연구는 드문 편이다. Von Hippel의 사용자 주도 혁신과의 관계는 자주 강조되지만, 스칸디나비아 전통의 정치적 성격을 리빙랩과 연속선상에서 이해하는 시도는 상대적으로 드물다. 이는 오늘날 리빙랩에 참여적 디자인이 지녔던 정치적 감각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스칸디나비아 참여적 디자인 전통의 역사는 더 나은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 분투였다. Gregory(2003)는 그 핵심 원칙으로 ① 민주주의와 민주화에 대한 강한 책무(deep commitments), ② 가치 기반의 디자인 활동과 상상된 미래에 대한 토론, ③ 갈등과 모순을 자원으로 삼는 디자인을 제시한다. 즉, 참여적 디자인은 산업 민주주의를 추구하며, 노동자들의 삶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기술개발 의사결정 과정에 참여하고 나아가 사회 구조와 권력 관계의 변화를 촉구했던 운동이었다. 더 나은 가치가 배태된 디자인을 통해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고 학습하며, 이질적 주체와 가치가 만나면서 발생하는 갈등과 모순을 창조적으로 활용해 정치적 변혁과 전환의 기회로 삼았다.


리빙랩은 이러한 스칸디나비아 참여적 디자인과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사용자 참여와 다양한 이해관계자 간 협력을 강조한다. 아이디어 탐색과 개발, 실험과 실증 및 피드백에 이르기까지 사용자들은 시민(citizen)이자 최종사용자(end user)로서 기술과 서비스에 대한 수요(demand)를 제기하며, 전문가들은 이를 기술개발 과정에 반영한다. 그 결과 사회적 가치가 배태된 기술과 서비스가 개발·실증된다. 이러한 활동의 궁극적 목적은 ‘사회문제 해결’에 있으며, 사용자들의 수요는 문제 해결의 원천으로 간주된다. 다시 말해, 오늘날 리빙랩 활동의 중심에는 ‘문제 해결’이 자리한다. 전 지구적 차원의 난제들이 지역 차원의 작은 문제들로 전환되어, 이를 해결하기 위한 실험과 실증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리빙랩이 ‘사회혁신’의 핵심 방법론으로 간주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리빙랩이 문제 해결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참여는 사회적 가치를 추구한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리빙랩을 사회참여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정치적 참여로 보기는 어렵다. 스칸디나비아 전통과 다르게 리빙랩에서 참여자의 위치는 소비자 또는 최종사용자의 자리에 배치된다. 이들의 역할은 기술과 서비스에 대한 수요(demand)로 번역될 문제(problem)들을 발굴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기술개발 과정에서 자신들의 선호(preference)와 피드백(feedback)을 전달하는 것으로 제한된다. 이 과정에서 시민들이 사회구조와 권력관계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거나 변혁을 도모하는 정치적 실천이 가능한 공간은 없다. 갈등이 리빙랩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촉진하는 요소라는 담론은 합의에 이르는 과정으로 포섭된다. 결국 갈등은 성공적인 문제해결을 위한 관리의 대상으로 전략하여 변혁과 전환의 기점으로 인식되지 못한다. 즉, 리빙랩이 사회-기술적 실험일 수는 있어도 정치적 실험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 점에서 리빙랩은 스칸디나비아의 참여적 디자인 전통을 온전히 계승한다고 보기 힘들다.


그러나 Bergvall-Kåreborn et al.(2010)은 리빙랩이 참여적 디자인의 역사적 뿌리를 계승하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 오늘날 리빙랩은 스마트시티, 탄소중립 등 전환을 목표로 한 다양한 도시와 지역의 실험 속에서 운영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리빙랩은 점진적 혁신을 추구하는 소규모 실험의 장으로 기능한다. 예컨대, 플라스틱 쓰레기 문제 해결을 통해 지역 차원의 탄소중립을 실천하는 식이다. 여기서 리빙랩은 전환을 실험하는 교두보이자 변혁적(transformative) 실천의 장이라 할 수 있다. 이는 곧 리빙랩이 사회구조와 권력관계의 변화를 지향하는 정치적 참여와 무관하지 않음을 의미하며, 스칸디나비아 참여적 디자인 전통을 계승해야 할 필요를 뒷받침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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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rgvall-Kåreborn, B., Howcroft, D., Ståhlbröst, A., & Wikman, A. M. (2010, March). Participation in living lab: Designing systems with users. In IFIP working conference on human benefit through the diffusion of information systems design science research (pp. 317-326). Berlin, Heidelberg: Springer Berlin Heidelberg.

chuurman, D., De Los Ríos White, M. I., & Desole, M. (2025). Living Lab origins, developments, and future perspectives. European Network of Living Labs (ENoLL).

https://doi.org/10.5281/zenodo.14764597

Gregory, J. (2003). Scandinavian approaches to participatory design. International Journal of Engineering Education, 19(1), 62-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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