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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타누키 차차 Jul 18. 2018

차라리 수박을 입고 싶다

뭐 그렇게 다를 게 있을까요 우리 인생?

 

길을 걷는다. 땀이 맺힌다. 금방 숨이 찬다. 왜 나왔을까 후회해도 이미 늦다. 계속 걷는다. 송골송골 이마에 맺혔던 땀이 흐르기 시작한다. 이마에서 구레나룻을 향해, 어깨에서 등 허리를 지나 흐르고 또 흘러내린다. 가슴팍과 겨드랑이에는 흘러내리지 못한 나트륨 물방울들이 떼지어 속옷과 티셔츠를 침략한다. 더위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던 나는 누구라도 부딪히기만 해봐라 가만 안 둔다 독이 오른 채 걷고 또 걷는다. 부딪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게 되려 더 열이 받는다. 더운데 열이 받으니 침략당한 겨드랑이가 급속도로 축축해진다. 참다못해 쏘아붙이게 되는 대상은 애석하게도 늘 내 옆을 지켜주는 사람이다.


 "그러니까, 휴무인지 아닌지 미리 알아보고 왔으면 이렇게 까진 안 걸었을 거 아냐"

 함께 걷고 있던, 나보다 땀을 더 많이 흘리고 있는, 그럼에도 내 손을 꼭 잡고 놓지 않는 남자친구에게 화를 내본다. 자기도 미리 알아보지 않은 주제에.


'차 있는 남자였음 좋겠다.'

 비린내 나는 진심이 차마 입 밖으로 나오지 못하고 죽은 물고기처럼 머릿속에 떠오른다. 자기도 차 없는 여자인 주제에.


 차도에는 뜨거운 바람 들어올까 입을 굳게 다문 승용차들이 홍대 거리를 내달리고 있다. 뜨거운 연기를 내뿜으면서. 인도에는 차곡차곡 퍼즐 맞추듯 쌓여 있는 실외기들이 세차게 돌아간다.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면서. 차도와 인도 사이, 나는 그 뜨겁고 좁은 길을 걷고 있다. 무언가에 패배한 사람처럼. 아무런 승부도 겨뤄보지 않은 주제에.  


 덥다고 손사래를 치며 몇 번을 뿌리친 손이 어느새 다시 내 손바닥을 포개고 있다. 집으로 가는 지하철이 도착해서야 그 손은 저만치 떨어져 열차 안 나에게 잘가라 인사한다.  


 집에 오는 길에 웬일이지 싶을 만큼 값이 싼 수박을 보고선 과일가게 앞에 섰다. 혼자 사는 우리 집에 저 수박 누가 다 먹나. 음식물 쓰레기만 나오겠지. 됐다 싶어 참외 4개를 골라 담는다. 애꿎은 수박을 힐끔거리며 생각한다. 이런 날씨엔 수박을 먹기보다 차라리 입을 수 있다면 좋겠다고. 나처럼 혼자 사는 사람도 수박 한 통 사가지고 와 반 통은 입으로 먹고 반 통은 옷으로 해 입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몸이 안팎으로 수박수박 청량해지는 상상을 하며 집으로 온다.   


 누구보다 빠른 스피드로 에어컨을 틀고 선풍기를 돌린다. 소금에 절인 배추처럼 축 늘어진 겉옷을 훌러덩훌러덩 벗어젖히고 참외 하나 깎아 입속으로 가져간다. 아, 이것이 행복이오. 인생의 참 맛이지. 잔뜩 찌푸린 얼굴일 땐 언제고 금방 실실거리다가 남자친구 생각이 난다. 뿌리쳤던 손이 생각이 난다.


 나는 왜 이리 못된 걸까. 왜 이리 못난 걸까. 하루 종일 덥다고 짜증 냈던 게 배부르고 시원하니 이제 와 미안해진다. 뿌리쳤던 손에게 미안해진다.


 내가 못된 게 아니라 날씨가 못된 게 아닐까. 그냥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될까.


 마지막 남은 참외 한 조각을 입속에 웅얼거리다 널어놓은 빨래가 생각나 베란다 문을 연다. 찜통이다. 누구보다 빠른 스피드로 다시 한번 몸을 잽싸게 움직여 잠옷이며 나시티며 바싹 마른 빨랫감을 급하게 걷어 방 안으로 나른다. 베란다를 사이에 두고 남과 북, 극명한 온도 차. 나는 전쟁통에 월남하는 사람처럼 빨래를 걷는다. 위잉 옥상에는 뜨거운 열기를 내뿜으며 돌아가는 우리집 실외기 소리가 포탄처럼 들린다.  


 못된 날씨를 만든 건 못난 나인 걸까. 수박 원피스를 발명해내면 조금은 덜 못난 사람이 되려나.

말이 안 되는 생각도 말이 안 되는 날씨 때문인 바야흐로 여름이다.    


 

이유도 없이 화내는 사람이 있다면 '너도 덥구나' 하고 한 번은 이해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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