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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와타누키 차차 Aug 06. 2018

모서리들의 공간

뭐 그렇게 다를 게 있을까요 우리 인생?

 다리에 멍이 들었다. 어디서 어떻게 생겨난 건지 나는 또 아무런 기억이 없다. 아침에 일어나 샤워를 하고 다리에 로션을 바르다 보면 푸른빛의 갓 멍이 든 자리를 심심치 않게 발견한다. 멍이 맞나 싶어 굳이 콕콕 손가락으로 누르다 보면, 아야야 곡소리가 절로 난다. 어째서 이런 짓을 반복할까. 손톱에 삐져나온 살 뜯기, 발바닥 물집 터트리기, 덜 익은 여드름 짜기와 덜 여문 딱지 떼기. 하면 안 되는 줄 알면서, 아플 걸 알면서도 꼭 해야 직성이 풀린다. 이런 건 무슨 심리일까. 고통을 통해 살아있음을 느끼는 인간 내면의 아주 근본적인 욕구일지도 모른다는 건 개소리고, 그냥 참을성 없는 인간이거나 변태겠거니 한다.


 멍 때문에 백혈병에 걸렸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혈소판 감소로 인해 백혈병이면 멍이 잘 생긴다는 말에 혹시나 했지만 아니었다. 당시 드라마 주인공들은 툭하면 백혈병이길래 흔한 병인 줄 알았다. 결론은 나는 그냥 부주의한 인간. 잘 부딪히고, 찌고, 다치고. 다쳤을 때는 아무런 생각이 없다가 나중에 상처를 보고 눈물을 쏟는 부류의 인간. 피가 나지 않으면 칼에 찔려도 멀뚱멀뚱 있을지 모르는.


 원룸으로 이사를 하고 나서 더욱 빈번히 생기는 멍의 실체를 파헤치기 위해 한 번은 의식적으로 다리의 움직임을 살펴보았다. 일어나서 침대 모서리에 한번, 밥을 먹으러 앉다가 식탁 모서리에 한 번. 다 먹고 치우려다 아까 그 모서리에 또 한 번. 움직일 때마다 내 다리는 규칙적으로 모서리들에 부딪혔고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이면 군데군데 멍이 들어 있었다. 한 마리 달마시안처럼.


 모서리들로 가득한 이 원룸은 태어나 처음 가져보는 나만의 방이다. 처음이라는 타이틀을 이길 수 있는 건 마지막 밖에 없다. 나는 아직 내 마지막 방을 가져본 적이 없으니 지금까지는 이곳이 나에게 가장 소중한 공간임이 분명하다. 본가엔 내 방이 없다. 잘 살 때도 없었고 못 살 때도 없었다 내 방은. 방 세 개짜리 아파트에는 엄마 아빠 방과 장남인 오빠 방, 그리고 대장암의 걸린 할머니와 내가 함께 쓰는 방이 있었다.


 할머니와 나의 방은 제일 큰 안방으로 겨울마다 손수 바느질을 해 덮는 솜이불을 넣어두는 옛날식 나무 장롱이 있었다. 그 옆으로는 툭툭 머리를 맞아야만 전기값을 하는 조그마한 텔레비전과 그것을 받치는 기다란 나무 화장대가 있고, 또 그 옆으로는 손잡이가 밥 먹듯 빠지는 나무 서랍장이 있었다. 죄다 나무였고 죄다 무거웠고 지금은 엔틱이고 그때는 올드였던 할머니 가구들이었다. 내 것이라곤 책상 하나, 그마저도 오빠한테서 물려받은 것이었다.


 할머니가 화장실을 다녀올 때마다 노인에게서 나는 특유의 쉰내와 혈변의 피비린내가 섞여 방안에 진동했다. 암에 걸린 할머니는 거의 매일 피똥을 쌌다. 밤이 되면 나는 그 늙고 병든 냄새를 맡으며 무지막지한 나무 장롱에서 그만큼 무지막지한 솜이불을 꺼내 양쪽 끝을 할머니와 하나씩 맞잡고 이부자리를 마련하곤 했다.  


 내 방이 없다는 게 별난 일임을 깨달은 건 대학교 때였다. 친구들은 모두 자기 방이 있었다. 헬로키티나 도라에몽으로 유아틱하게 꾸며진 방부터, 레이스 중독자 같은 방, 인테리어라고 하기에 무색할 정도로 마구잡이식 방도 있었지만, 어쨌거나 다 그들 자신의 방이었다. 태어나면서부터 할머니와 방을 같이 썼다고 그래서 한 번도 내 방을 가져본 적이 없다고 말하자 아이들은 내가 효녀 심청이라도 된 듯 나의 효심을 높게 평가했다. 나는 그딴 이유 때문이 아니라 정말 그냥 내 방이 없는 거라고 말할 수 없었다.


 "나도 내 방 갖고 싶어. 이사하면 작은방 나 줘. 안방은 오빠가 할머니랑 같이 쓰라 해."


스물한 살이었나. 이사를 준비하면서 나는 처음으로 내 방을 갖고 싶다 말했다. 엄마는 혼 내키거나 더 묻지도 않고 알겠다고만 했다. 그게 이상했지만 알게뭐냐 내 방이 생긴다는데, 신이 나서 엄마랑 가구점에 가 책상이며 화장대를 보러 다녔다. 흰색의 깔끔한 디자인의 누가 봐도 여대생이 쓸 거 같은 가구들을. 이삿날을 소풍날처럼 손꼽았다.


 "왜, 이제 악어가 나랑 방 쓰기 싫테냐? 병들어 내가 싫테냐?"


 안방에서 할머니가 엄마랑 대화하는 소리가 거실까지 들렸다. 할머니는 서러운 것 같기도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내 방이 갖고 싶은 것과 할머니가 싫은 것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하루 종일 나를 외면하는 할머니를 보며 나는 엄마에게 가구점은 다시 가지 않아도 될 것 같다고 했다. 엄마는 그런 나를 그저 바라보았다. 미안하다고도 하지 않았다.


 "근데 있잖아 나도 이 집에 시집와서 할머니 할아버지 모시느라 안방을 써본 적인 한 번도 없어."


 내 방을 갖고 싶다고 했을 때 엄마가 왜 아무것도 묻지 않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기도 했다.

 

 할머니의 냄새는 암이 심해질수록 고약해졌고 신음소리는 끊이질 않았다. 스물셋, 나는 그 방을 견디지 못하고 영어를 핑계 삼아 호주로 떠났다. 출국을 며칠 앞두고 할머니는 입원을 했다. 간호사가 할머니의 대변을 받아내는 장면이 내가 기억하는 할머니의 마지막이다. 할머니는 내가 호주에 간 지 2주 만에 기다렸다는 듯 세상을 떠났다.


 남의 나라, 낯선 방. 눈을 뜨면 눈물이 흐르고, 눈을 감아도 눈물이 새어 나오는 낮과 밤의 연속이었다. 똥을 싸다 말고 우는 일이 많았다. 얼마나 아팠을까. 매일 변을 보는 게 매일 애를 낳는 것처럼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그 방만 아니면 된다고, 할머니만 아니면 된다고, 떠나오면 다 괜찮을 줄 알았는데 나는 매일 울고만 있었다. 너무나 부주의한 탈출이었다.   


 한국에 돌아오니 안방은 내 방이 되어 있었다. 화장실까지 딸린 그 큰방을 혼자 쓰면서 깨달았다. 내가 더 이상 이 집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걸. 할머니는 나를 업어 키운 부모였고, 공기놀이를 같이하고 뜨개질을 가르쳐 주고 화투판 앞에선 얄짤없이 똥광만 먹어가던 내 첫 룸메이트였다. 마지막 룸메이트만 이길수 있는 사람. 이 방의 전부.      


 취직을 하고선 친구네 옥탑방에 얹혀산다거나 이태원 쉐어 하우스에서 산다거나, 그 쉐어 하우스에서 만난 언니와 산다거나 했다. 함께 살던 언니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버리면서 지금의 원룸을 얻었다. 스스로의 힘으로 마련한 나 한 사람을 위한 공간. 내 방은 서른이 주는 선물이었다.   


 냉장고며, 소파며, 접시며... 대학교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받는 기분으로 살림살이들을 사들였다. 귀찮은데 설레고 막상 나간 돈을 보면 끔찍한데 그래도 되돌리고 싶지는 않은. 하나하나 차근차근 늘어난 살림살이에 얼마 전 공기청정기까지 들여놓으니 이젠 요가 매트 하나 깔아놓기도 벅찬 상태가 되어버렸다.


 살림살이들은 약속이나 한 듯 네모나고, 그래서 공격적이다. 네모난 침대 옆엔 네모난 서랍과 네모난 책상 그 위엔 네모난 컴퓨터와 네모난 스피커. 그 옆으로는 네모난 소파와 네모난 냉장고, 또 그 앞으로는 네모난 카펫 위에 네모난 식탁이 있다. 갑자기 소름이 돋는다. 이건 모서리들의 습격이다.


 글을 쓰는 지금도 푸르딩딩 멍이 든 달마시안의 다리를 익숙한 폼으로 책상이 품고 있다. 멍하니 앉아 방을 둘러보니 내가 어떤 공간을 채우고 있다기 보다 그저 모서리가 내어준 공간에 잠시 머물고 있는 느낌이다.


 여기가 정말 내 공간이 맞는 걸까. 이렇게 멍든 채로 살아가도 괜찮은 걸까. 버려야 할까 넓혀야 할까. 둘 중 하나라도 할 수 있는 능력이 내게 있을까.


 '솜이불 하나 깔아 놓을 자리도 없으면서, 뭐 한다고 이리 사노.'



그러게 할머니 뭐 한다고 이리 살까 나는.



할머니가 가고 모서리가 남았다.  



한두 번쯤은 놀러 오시지 않았을까, 내 방에 우리 할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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