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너나 나나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와타누키 차차 Sep 23. 2018

민희. 정희. 캐리.

파마한 머리는 대개 망한다.

 파마가 망했다. 이번에는 특별히 더 신경 써서 망했다. 시작은 김민희였다. 배우 김민희가 베를린에서 여우주연상을 받았을 때의 파마머리. 예뻤다. 나의 바람은 소박했다. 김민희 얼굴도, 몸매도, 남자 이력도 아닌 그녀의 파마머리만 잠시 내 것이 되게 해주소서.


 성신여대 근처의 자그마한 미용실을 선택한 건 실장님의 실력 때문만은 아니었다. 애티튜드. 나는 그녀가 서비스 업을 수행하는 태도에 반했다. 그녀는 매번 나를 알아보았다. 일 년에 한 번씩 아주 드문드문 들리는 나를 아주 디테일하게 기억해낸다. 직전의 머리 상태, 좋아하는 헤어스타일 심지어 그 동네 사는 내 친구의 이름까지도. 어디다 적어놓으셨나고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하시냐고 뜨내기 손님인 내가 물을 정도니 그녀에게 단골이 많은 건 당연지사다. 


 어떤 머리를 할 거냐 묻는 실장님께 조심스레 김민희를 내밀었다.


"안 되겠죠? 아직은..."

사진 속 김민희에 비해 기장이 턱없이 부족한 나는 되지도 않는 말을 물었다. 역시나 안될 거 같다고 지금 이 길이에서는 굵은 C컬이 어울린다고. 위는 매직으로 피고 아래는 C컬로 말아주겠다고.


"그래도 이 머리가 하고 싶어서 온 건데..."

투철한 직업정신과 남다른 애티튜드로 무장한 그녀는 아쉬워하는 나를 달래려 그래, 한 번 해보자 마음먹었다. 그리곤 나의 머리를 아주 꼼꼼히 말아주었다. 내가 원하던 김민희처럼. 


 다음은 뭐 뻔하지 않은가. 내 머리는 김민희고 뭐고 부푼 삼각김밥 같은 것이 드라마 나의 아저씨의 '정희'처럼 되어버렸다. 머리를 감고 드라이를 하기 전부터 이 머리가 망했다는 것을 눈치챘다. 번개 맞은 미역줄기들이 내 머리에 붙어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했지만 드라이를 하고 완성된 머리를 보고 있자니 당혹스러운 표정을 감출 길이 없었다. 리프레시한 새 머리의 느낌을 한껏 만끽하고자 옷도 예쁘게 입고 평소에 안 신던 발 아픈 구두도 신고 남자친구랑 데이트 약속도 잡아놨는데 내 귓가에는 백만 송이 장미(드라마 속 정희 테마곡이다)만 들렸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민희가 가고 정희가 왔다.


 민희를 밀어낸 정희를 밀어내기 위해 데려온 사람은 캐리였다. 오래된 미드, 섹스 앤 더 시티의 주인공 캐리 브래드쇼. 뽀글하다 싶을 정도로 곱슬거리는 파마머리가 그녀의 트레이드마크다. 최근 시즌 1부터 다시 보고 있던 참이었다. 그래, 나는 캐리다. 자유분방하고 당당하고 솔직한 삼십 대 여성. 왠지 이 머리로 글을 쓰면 극 중 칼럼니스트인 캐리처럼 글이 더 잘 써질지도 모른다는 주문을 걸면서.


 다음날 아침, 머리를 감다 주문도 함께 씻겨 내려갔다. 다시 정희였다. 백만 송이 장미는 시들지 않는다. 이 낯선 처자와 익숙해지고자 한참을 거울 앞에 서 있었다. 들떠있는 머리와 달리 축축 처진 기분으로 화상 치료 중인 피부과에 들렸는데 그곳에서 생각지도 못한 선인이 주문을 걸어주었다. 간호사 언니가 나를 알아본 것이다.  


"어머, 머리하셨네요? 그죠? 너무 예쁘다"

 경미한 화상이라 두어 차례 진료를 받다가 그만두고 한 달 만에 찾아간 피부과였다. 나는 그 간호사 언니 얼굴조차 기억이 안 나는데 나를 기억하시곤 그렇게 말해주었다. 아니면 이 머리는 누가 봐도 어제 파마한 사람처럼 보이기 때문인 건가. 그러나 나는 또 단순하니까 금방 헤헤 거리게 되었다.


 진료가 끝나고 저녁거리를 사러 동네 슈퍼엘 들렸는데 그곳에선 더 강력한 주문이 들어왔다. 시금치와 당근을 계산하려는 나를 카운터 아주머니께서 알아본 것이다.  


"파마했네. 고데기 아니고 파마한 거 맞죠? 엄청 매력적이에요"

정말이지 이 두 사람은 나와 모종의 관계가 있는 사람이 전혀 아니므로 이때부터 나는 한치의 의심도 없이 캐리 브래드쇼가 될 수 있었다. 슬리퍼는 지미추가 되고 시금치와 당근이 든 검은 봉지는 구찌가 되었다. 자신만만하게 위풍도 당당하게. 


 집에 도착해 다시 한참을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옷을 이렇게 입어서 그렇지 조금만 신경 써서 입으면 캐리가 될 것도 같았다. 나를 알아봐 준 사람들, 제3의 말들, 객관적인 그 말들을 믿어야지. 그럼 그럼.


 얼른 캐리가 보고 싶어 노트북에 저장한 섹스 앤 더 시티 폴더를 열었다. 하루에 두 편씩은 보다 보니 어느새 시즌 2의 중간 지점이다. 하루 중 내가 가장 사랑하는 시간. 오징어 구워서 마요네즈에 찍어서 섹스 앤 더 시티 플레이!


 곱슬머리의 캐리가 뒤돌아보는 인트로 장면이 끝나자 에피소드가 시작되었다. 쾌청한 가을 하늘을 등지고 내 머릿속엔 소나기가 내렸다. 캐리의 머리가 곱게 펴져있었다. 갑자기 스트레이트의 캐리라니. 당당함 속에 차분함이 엿보이고 품격까지 있어 보이는 저 생머리 여자가 캐리인 것이다. 극 중에서도 스트레이로 핀 캐리의 머리를 사람들이 예쁘다며 칭찬한다. 캐리는 왜 머리를  폈을까. 왜 그게 하필이면 오늘일까.    


 꼬불꼬불 불 위에서 춤을 추던 오징어 다리를 턱이 빠져라 씹었다. 돌돌 말린 오징어가 입속에서 꽤 오랫동안 버티다 사라진다. 나의 민희도 나의 캐리도 사라진다.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 없이...       


 내가 나를 알아보지 않으면 어떤 주문이든 약발은 오래가지 못하는 모양이다.



안 감아도 티가 안 나며 묶었을 땐 볼륨감이 살아나고 똥머리는 자연스럽다 나의 정희 머리.  


매거진의 이전글 꼭 한 숟가락을 남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