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송 얘기가 오가는 와중에 차나 한잔 하자고 했다.
돈을 벌어 보자고 마음먹은 동시에 일이 끊겼다. 마음은 또 초조해진다. 큰 맘먹고 트랙에 올라 달릴 준비를 하고 있는데 도통 울리지 않는 신호탄. 아직은 달릴 때가 아니구나 하고 내려오면 될 것을, 그 단순 것을 쉽게 해내지 못한다. 애가 탄 채로 발을 동동 구르며 한 달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어때? 소송의 불바다로 뛰어들어 볼래?"
뜻밖의 질문이 초조감에 균열을 냈다. 균열의 틈새로 걷잡을 수없이 솟구친 그다음 감정은 분노감이었다.
수개월의 갑질을 참지 못하고 끝까지 마무리 짓지 못했던 프로젝트가 하나 있었다. 우리는 당시 미리 받은 선입금을 해당 회사에 돌려주지 않고 있었다.(을의 사정에서 잠깐 언급했던 내용이다) 지금까지 해온 걸 생각하면 그 돈도 사실은 터무니없이 부족한 액수였다. 허나, 우리는 쫄보들인지라 돈은 돌려주기로 했지만 돈 이야기가 나오자 한순간 태도를 달리한 담당자에 대한 소심한 복수심으로 최대한 시간을 끌자며 버티고 있는 중이었다.
그날은 담당자가 아닌 대표에게서 문자가 왔다. 대략 요약해보면 계약서를 작성하지 않았어도 구두로 서로 합의하였기에 계약의 효력이 있고 중도 하차는 우리의 일방적인 계약 파기나 다름없어 지급했던 선입금은 물론이거니와 피해 보상금까지 선입금의 6배에 달하는 금액을 청구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변호사와 확인했다. 그러나 우리는 소송을 통해 서로의 귀중한 시간과 감정을 낭비하게 하고 싶지 않으니 현명한 결정 내려 주시라. 아주 정중하고도 날카로운 문자였다.
내가 너를 찌르고 싶지는 않으나 칼은 쥐고 있으니 현명한 결정 내려주시라.
나는 그 문자를 그렇게 해석했다. 읽는 내내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두 번 세 번 읽었다. 꼭꼭 씹어 읽어도 협박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정말 오랜만에 담배를 사러 나갔다.
박조이는 소송의 불바다로 뛰어들 거냐 말 거냐 우리의 의견을 묻고 있었고 스타워즈는 주변에 아는 변호사가 있었으면 도움이 되었을 거라 말하고 있었고 나는 담배를 피우며 계속 부들부들거리고 있었다.
"다 됐고요. 내일 당장 돈 돌려준다고 하세요. 저는 우리가 을이라는 이유만으로 무형에 아이디어에 대해 갑이 변덕과 변심으로 수정과 다시를 남발하는 것을 당연시 여기고 우리와 같은 사람들을 노예처럼 부려먹고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이 끔찍한 일에 대해 투고할 테니." 소송을 전쟁으로 대갚음하려는 나였다.
아이디어의 단가를 책정하는 건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똑같은 돈을 받고도 컨펌 여부에 따라 어떤 프로젝트는 일주일 만에 끝나고 어떤 프로젝트는 몇 개월을 이어 간다. 방법을 모르는 건 아니다. 수정 횟수에 제한을 두고 처음부터 합의를 한 후 일을 진행하면 된다. 그러나 우리 같은 사람들은 그렇게 하면 밥 줄이 끊긴다. 이름도 없고 포트폴리오도 마땅치 않은 을 중에 을인 신생회사.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고작 해야 이번 클라이언트는 제발 신사적이고 합리적이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어느 게시판이 되었든 잘못된 관행에 대해 작은 목소리라도 내야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동시에 사업이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떤 쪽을 고려해 보아도 끊는 점을 넘어선 분노는 도무지 가라앉지 않았다. 내가 한참 격양된 목소리로 그 대표에 대한 욕을 하고 있는 동안 박조이가 말했다.
"차나 한잔 하자고 했어 대표한테. 이거 사실 어제 온 문자야 너네 신경 쓰일까 봐 일부러 말 안 했어. 오늘 낮에 만나고 오는 길이다."
박조이는 대표의 소송 관련 문자를 받고 실소를 터트렸다고 했다. 조금 더 정확한 표현으로는 화도 나지 않고 아니 뭐 이런 액수 때문에 소송까지 언급하는 게 귀여웠다고. 그렇게 소중한 돈이면 돌려줘야지 생각했단다. 다만, 우리와 그들이 어떤 지점에서부터 어긋났는지 이야기는 나눠보고 싶었다고.
"그 근처 카페 가서 대표랑 만나서 얘기하고 왔어. 우리가 담당자의 어떤 부분에서 화가 났는지 정확하게 전달했고 돈은 처음부터 돌려줄 생각이었다고 쓰지도 않고 그대로 있다고 얘기하고 하니까 다 들어보더니 오히려 미안하다고 하던데? 원래 다 드려야 되는 게 자기도 맞다고 생각하는데 그러지 못해 죄송하다고 반만 돌려 달래"
그저 놀라웠다. 나는 전혀 고려하지 못했던 수였고 참으로 현명한 수였다. 스타워즈도 외교적으로 볼 때도 굉장히 훌륭한 처사였다며 그녀를 인정했다.
나는 광고대행사를 다니면서 을의 입장에서 직장생활을 한 게 전부다. 정말 말도 안 되는 피드백과 일정이 넘쳐다는 곳이다. '나는 을이다'를 뼛속 깊이 새기지 않으면 버티기가 힘들고 그러다 보니 일종의 피해 의식이 생겼던 것 같다. 이 사람이 갑이라는 이유로 우리를 우습게 본다. 사람 취급 안 한다. 노예처럼 부려먹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한다. 말이 안 통한다. 그러니까 그냥 영혼 없이 하라는 대로 해주자. 어느 순간 상대는 내 속에서 괴물이 되어 있고 나는 눈도 마주치기 싫은 괴물의 오더에 따라 움직이는 좀비가 되어 버렸다. 아마 박조이가 이번 사건을 현명하게 해결하지 않았다면 그 담당자와 대표는 여전히 내 안에 괴물로 남아있었을 것이다.
갑을 귀여워할 줄 아는 마음이 을의 품격을 만든다.
상대에게도 나름의 어려움과 사정이 있고 그것을 가여워하는 마음으로부터 상대에 대한 이해가 시작된다. 누군가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끓어온다면 상대를 괴물로 만들기 전에 자신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내가 얼마나 그를 이해하고 있는가. 이해의 과정을 위해 과연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가.
우리가 일그러진 얼굴에 기품이 없다고 느끼는 건, 목청껏 내지른 목소리에 교양을 갖추라 말하는 건 그것이 단순히 다른 이의 기분을 상하게 하고 주위 환경을 어지럽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일그러진 얼굴로 소리 지르고 있는 자가 '나는 나를 돌아보지 않은 사람이요' 스스로 자백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날의 수많은 자백서를 갈기갈기 찢어내고 싶을 만큼 후회하고 또 후회했다.
분노 그 자체는 나쁜 것이 아니다. 감정은 일어날 수밖에 없는 순수한 내 마음이니 그걸 나쁘다고 죄악이라고 여겨봤자 자기 자신을 미워하는 것과 다름없다. 다만, 그 순간의 감정이 내 얼굴에, 목소리에 아무런 검열 없이 드러나는 일은 분명 경계해야 함을 깨달았다. 결국 그것이 내 생각이 되고 태도가 되고 품격이 될 테니까.
갑을 귀여워하는 을이 되고 싶다.
이런 마음이 생겨서인지 요즘은 화가 나다가 만다.
참으로 신기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