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년 겨울 여행 1일 차_1
[트라피스트 맥주]
유럽에선 먼 과거부터 수도원에서 맥주를 양조했다. 포도주가 성혈이라면 맥주는 액체빵의 의미를 가져 수도원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에게는 한 끼의 식사였다. 가톨릭의 여러 정교회중에서 트라피스트회의 맥주가 가장 유명한데, 이는 아무나 트라피스트 양조장이라는 이름으로 맥주를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국제 트라피스트 협회가 있고 철저한 자격조건으로 선별된 수도원의 양조장만이 트라피스트 맥주를 만들 수 있다. 트라피스트 양조장도 시간이 지나며 계속 바뀌는데, 18년에 영국의 Mount St. Bernard 수도원이 등록되었고 기존에 미국에 유일하게 하나 있던 Spencer 수도원의 양조장이 재정문제로 22년에 문을 닫았다고 한다. 현재기준 트라피스트 양조장은 전 세계에 10개만 있고 그중 5개의 양조장이 벨기에에 있다.
[베스트블레테렌]
트라피스트 맥주들은 대부분 유명하지만 그중에서도 희소성으로 가장 유명한 맥주는 베스트블레테렌 맥주라 불리는 맥주이고 3종류 "Blond, 8, 12"이 있다. 이는 벨기에의 서쪽 블레테렌(Vleteren)이라는 작은 지역에서도 서쪽에 있는 베스트블레테렌(Westvleteren)의 Sint-Sixtus수도원에서 만든 맥주다. 이 맥주는 한국에서도 옛날부터 맥주 애호가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찾아보니 최근 한국에서 구하려면 330mL에 28000원에 판매된다고 한다. 사실 맥주에 이 가격이라니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예전에는 한국에서 58000원에도 팔았으니 가격이 많이 내리긴 했다.
베스트블레테렌 맥주는 현지에서도 구하기가 쉽지 않다. 브뤼셀 중심가의 보틀샵에서도 한화로 2만 원가량에 판매가 되고 수량도 많이 풀리지 않았다. 요즘에는 인터넷으로 주문 및 배송이 가능해졌지만 수량한정에 벨기에 지역한정이었다. 다른 방법으로는 수도원에 직접 가서 살 수 있는데 수도원 앞의 In de Vrede라는 레스토랑에서 6개들이 팩을 24유로에 판매한다. 레스토랑에 6개들이 맥주도 예약은 불가하고 재고가 없으면 살 수는 없다. 그래도 보통 이 방법이 가장 보편적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미리 인터넷으로 수령 날짜를 등록하면 24병짜리 맥주를 4짝까지 구매가 가능한데 이때는 한 병에 2유로(약 2700원) 정도면 구매할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은 쉽지 않은데, 우선 차량수령만 가능하다. 사이트가입을 위해 수령 시 사용할 차량 번호를 정확하게 기재해야 한다. 그리고 수령일 직전 주에 지정된 시간에 사이트에서 기다리면 구매가능한 링크가 나온다. 해당링크에 들어가서도 정해진 시간 내에 구매와 결재까지 완료해야 한다. 렌트를 해서 오는 여행객도 구매는 가능하겠지만 구매날짜 일주일 전에는 차량 번호를 알아야 하니 여행객이 현지에서 몇 짝을 구매하긴 쉽지 않은 구조다. (https://www.trappistwestvleteren.be/en/beer-sales)
[수도원으로]
여행 일주일 전 사이트에서 미리 맥주를 예약했다. 이번에 오랜만의 여행이니 큰 맘먹고 Blond 한 짝, 8 한 짝, 12 두 짝을 구매하고 현장수령을 하기로 했다. 이번 벨기에 여행에서 베스트블레테렌은 제일 먼 곳이라 첫날 여기까지 가고 돌아오는 길의 부담을 줄이기로 했다. 집에서 수도원까지 거리는 약 7시간이어서 일찍 출발했고 좀 먼 거리이긴 했지만 날 기다리고 있는 맥주를 생각하며 떠났다.
반나절은 운전했기에 슬슬 피곤해질 때쯤 시골길에 접어들었고 좀 더 가다 보니 수도원을 향하는 작은 표지판이 보였다. 너무 시골길이라 과연 이런 곳에 특별한 양조장이나 레스토랑이 있나 싶을 정도의 의문이 생겼지만 어느새 정갈한 외관의 수도원이 나타났다.
그렇게 겨우 도착한 수도원은 들어갈 수 없었다!!
사실 양조장을 놀러 가면 양조장 투어도 하고 구경도 할 것 같지만 수도원에 있는 양조장은 역시 특별하다. Sint-Sixtus 수도원은 수도원 내부도 출입이 금지되어 있다. 외부인은 수도원의 대문만 볼 수 있었다. 수령지도 어디 있는지 설명이 없어서 지나가는 신부님에게 물어보고 찾을 수 있었다. 우리는 맥주 수령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 레스토랑에 먼저 들어가기로 했다.
[레스토랑 In de Vrede]
이곳은 관광지도 아니고 볼거리가 있는 곳도 아니다. 양조장이나 수도원도 들어갈 수 없기에 맥주수령만 하면 할 일은 없어진다. 다행인 건 바로 앞에 레스토랑이 있다는 점이다. In de Vrede라고 수도원에서 만드는 여러 가지 음식이나 굿즈를 파는 곳이다.
건물이 생각보다 깨끗한 새 건물이라 놀랐다. 앞에는 나무짝으로 만들어놓은 잔모양의 구조물도 있었다.
레스토랑에 들어가면 왼쪽에는 여러 물건을 판매하는 작은 숍이 있고 수도원에서 만드는 쨈이나 치즈도 판매한다. 맥주 이외에도 여러 가지 수도원 제품들이 유명하다고 한다.
물건은 구경만 하고 들어가서 앉았다.
인적 드문 시골에 이렇게 깔끔하게 잘해놓은 곳이 있나 싶을 정도로 쾌적하고 좋은 레스토랑이었다. 평일 오후라 그런지 사람도 없고 분위기도 좋았고 동네 어르신들과 자전거 라이더 정도만 앉아서 맥주를 한잔씩 하고 있었다. 맥주가격은 일반적인 레스토랑에서 먹는 평범한 맥주가격과 같았고 종류별로 한 병씩 주문했다.
차례대로 맥주 스타일은 벨기에 스타일로 벨지안블론드인 Blond, 두벨 8, 쿼드루펠 12로 구성되어 있다.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라벨 없이 판매했는데 이번에 가보니 라벨이 붙어있었다. 원래 라벨까지 없어서 더 특별한 이미지가 있었는데 왜 붙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벨기에 스타일 맥주 중 두벨과 쿼드루펠 중간에 트리펠이라는 스타일은 하나 더 있지만 베스트블레테렌에서 만들고 있진 않다. 원래 12가 가장 유명해서 한국에도 12만 들어가는 거로 알고 있고, 나도 12만 마셔봤던 상태였다. 나머지는 이곳에서 처음 마셔봤다. 세 맥주 모두 역시나 흠잡을 곳 없이 좋은 맛이었다. 정말 깊으면서도 프레쉬한 맛이 너무 좋았다. 같은 스타일을 만드는 다른 양조장들의 맥주보다 확실히 좋은 맛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나는 맥주뿐만 아니라 모든 술의 맛은 마실 때의 분위기가 절반이상 차지한다고 생각하는데, 당연히 이곳에서 마시니 더더욱 좋았다.
음식은 특별한 것은 없었고 수도원에서 만든 재료로 만든 요리들이 있었다. 치즈와 햄을 시켜서 먹었고 치즈는 맛있었다.
[맥주수령]
천천히 식사와 함께 맥주를 즐기다 보니 수령시간이 와서 바로 앞에 수령지로 갔다. 수령지도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었는데, 그냥 수도원 옆에 있는 작은 건물에서 받을 수 있었다. 맥주를 한 짝 한 짝 트렁크에 쌓아두고 병들을 보니 마음이 풍요로워졌다.
한국에 들고 가서 팔면 얼마인지 자연스레 계산이 되었지만 구매할 때 재판매하지 말라고 이야기하는 것을 보니 대부분 사람들 생각하는 게 비슷했나 보다.
좋은 맥주를 싸게 많이 사고 기분 좋은 상태로 다음 도시로 이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