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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차 Aug 30. 2024

철학과 종교, 미학이 이끄는 혼돈의 세상

예술영화 <희생>

예술영화 <희생> 포스터와 영화가 상영 중인 씨네큐브 전경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마스터피스. 화면이 참 아름답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세계는 저 구름 너머 유토피아처럼 닿을 길 없이 멀리 떠 있다. 이 영화가 그러하다. 비록 비극으로 끝나지만 영화 자체가 하나의 희극, 블랙 코미디 같다. 그만큼 평온하고 평화로워보이며 오히려 내가 이상해보일만큼 현실과는 동떨어져 있는 영화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알렉산더는 성스러운 인물이다. 결코 용납되지 않을 불륜과 방화도 이 영화에서만큼은 '희생'이라는 전혀 다른 시선으로 읽힌다. 왜 그럴까? 단순히 연출 기법 때문일까? 아니면 초현실적인 화면 설정 때문일까? 바로 알렉산더는 인간에게가 아니라 신에게 기도하고 의지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영화가 만들어진 1985년은 소련 연방이 해체되기 이전으로, 지구와 인류의 종말이라는 세기말의 공포가 다가오던 때였다. 영화 전반에 깔린 삭막한 분위기는 2024년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던지며 타르코프스키 감독이 여러 작품을 통해 집대성한 이 유작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종교 철학적 담론을 이끌어낸다.

이 영화는 주인공의 생일 단 하루라는 시간 동안 일어나는 일이지만 너무나 압축적으로 전개되고 있고 또 함축적인 대사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 관람하고 해석하는 데에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 영화의 감독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가 주는 메시지를 이해하고자 여러 자료들을 참고해보기도 하였다. 영화가 난해하여 기존에 알고 있던 여러 작품들과 비교해 보며 감상기를 남기기로 마음먹었다.


미나리(2020) - 불태우는 장면

대자(1885) - 그루터기에 물 주는 장면

좁은 문(1909) - 성스러움을 추구하는 태도


이 영화를 보며 떠오르는 예술영화 <미나리>와 비슷한 배경-한적한 곳에 동떨어진 임시 가옥, 5명 정도의 구성원-이지만 연출 방식이나 전반적인 분위기가 정반대이다. 클로즈업을 통해 인물의 성격을 드러내고 개성적인 각 인물을 최대한 부각해 전체적인 생동감을 자아내는 <미나리>와 달리 <희생>에는 넘치는 생명력이 거의 없다. 오히려 다빈치의 회화와 유럽 지도로 표상되는 정적인 공간에서 역설적으로 살아있음을 느낀다.

또한 하나의 숏을 길게 촬영하는 기법인 ‘롱테이크’와 카메라를 피사체로부터 멀리 하여 전경을 모두 찍을 수 있도록 하는 ‘롱숏’ 기법을 통해 보다 오래, 찬찬히, 그리고 멀리 보고 생각해 보아야 할 철학적, 종교적, 미학적 탐구를 고민케 한다. <미나리>의 불이 약동하는 봄의 민들레 같은 희망이라면 <희생>의 불은 추운 겨울에 피는 동백꽃의 화려함이다. 후텁지근하고 답답한 만담의 결론을 속시원히 날려주듯 마음속 카타르시스의 분출이 인다.


아버지 알렉산더는 아들 고센에게 수도승 이야기를 하며 인내를 가르친다. 혼란스러운 시절 참고 견디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다. 그러면 언젠가는 죽은 나무에서도 꽃이 피듯 좋은 시절이 온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알고 있기 때문이다. 수도승 이야기에서 떠오른 것은 톨스토이의 단편 <대자>이다. 대자는 은사의 가르침에 따라 죽은 그루터기에 입으로 물을 주는 임무를 매일 수행한다. 그러면서 강도를 만나 하나씩 깨달음을 얻으면 사과나무 잎이 그루터기에서 돋아난다. 여기서 강도는 '희생'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오늘날 현대 사회에서 어떤 협박과 살인도 쉽게 지나치지 않는 것은 인간에 대한 기본적인 존중과 믿음 때문이다. 하물며 전쟁의 시대에서 희생이란! 전쟁에서는 수많은 희생이 뒤따른다. 이념에 대한 갈등 때문이다. 고센은 문득 잠에서 깨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잠'은 호주로 도피하려는 빅터를 통해 구체화된다. 알렉산더 또한 인류의 파멸에 대한 공포에 아무런 대안을 찾을 수 없다. 오직 신에게 기도할 뿐이다. 오토는 조금 더 문제의 본질에 다가간다. 그는 파출부 마리아와 동침하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알렉산더는 오토의 말에 따라 세상을 구원하고자 한다. 자신을 희생하여 세상을 구원한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는 잘 모르겠다. 다만 순수한 마음으로 삶을 탐구하고 극복하려던 알렉산더의 태도는 눈여겨볼만하다. "허허허,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것으로 살아가면 되지." 바로 움막을 짓고 살아가는 대자의 말이다.


사랑하는 남자와 결혼하는 대신 알렉산더와 결혼하여 고센을 낳은 아델라이드, 그의 가족에게 웃음이란 없고 따스한 온기도 찾아볼 수 없다. 전남편의 딸 율리아와 알렉산더의 아들 고센, 새 남편 빅터와 모두 함께 있는 아델라이드는 남자들 틈에서 뭉크의 그림처럼 절규한다. 이쯤에서 영화 <희생>은 마치 연극처럼 보인다. 정적인 배경 앞에 자막만이 끊임없이 재생산된다. 마치 꾸며진 무대에서 연기하듯 아델라이드는 비난과 몰이해의 시선에 반한다.

마리아의 사랑을 갈구하는 알렉산더가 일회적인 관계를 통해 자신을 버리고 세상에 나아가고자 함은 시대적 배경 속에 어긋난 성스러움을 추구하려는 것이다. <좁은 문>의 알리샤도 제롬을 사랑하지만 끝내 죽음에 이른다. “우리가 서로 가장 가까이 있을 수 있는 것은, 우리 둘이 저마다 서로를 잊고 하나님께 기도드릴 때뿐이라고 생각되지 않니? “ 알리샤 또한 그런 종류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알렉산더에게 세상이란, 그리고 세상을 구원하는 것의 의미란 무엇이었을까 하는 의문이 남는다. 언젠가 우리가 사는 요즘 세상은 참 좋은 세상이라고 할머니가 해주신 말이 기억에 남는다.


마지막으로 현실에서 한 가지 예를 들어보도록 하자. 전남 고흥에 가면 ‘수선재’라는 명상단체가 있다. 이 단체는 90년대 말 등장하여 약 30년간 존속하다 최근 청산 절차를 밟고 있다. 종말 프로젝트를 위해 불합리한 은폐를 저질러온 것이 발각된 것이다. 150억의 기부금이 증발했지만 자살한 대표는 말이 없다. 그래서 이 단체가 사이비가 아니냐는 주장이 거세지고 있다. 잘못된 믿음이 이끈 결과이다. 그러면 자본과 힘이 지배하는 오늘날 종교적, 철학적 뿌리내림은 어떻게 확고히 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의 물신숭배에 관한 분석 이후로 오늘날의 자본주의 사회는 역사적으로 유례없는 불평등을 경험하고 있다. 오늘날은 대학 입시에서도 신학과와 철학과가 낮은 점수대의 축을 형성하고 무교의 비율도 늘어가고 있다. 한 조사에 의하면 대한민국은 인구의 60%가 종교가 없는, 상당히 탈종교적인 국가라고 한다. 물질문명이 고도로 발달하는 가운데 종교적 규율을 벗어 버리고 자율적인 행보를 걷고 있는 현상은 사람들의 삶을 속박하고 불균등한 격차를 강화한다.

이 또한 언젠가 역사가 되어갈 것이고, 우리는 오늘날의 문제에 보다 현명하게 대처할 필요가 있다. 지금 고흥 나로도에서는 우주개발이 한창이다. 나로호의 성공적인 발사처럼 우리의 염원인 전쟁의 잔재-통일과 인간성의 회복, 역사의 중요성-가 해결될 날이 오기를 바라본다. 드넓은 우주에서 우리는 누구일까, 내세는 과연 있으며 태초란 무엇일까, 아름다움은 진리인가 자본인가에 대해 끝없는 물음표가 이어진다. 시대 속의 나의 위치에 대해, 가족의 가치와 세상의 평화에 대해 한번쯤 고심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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