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긍정적 자아를 만드는 과정

by 채채

한동안 내 딸은 자기만의 동굴에 스스로를 가둬두고 그것도 모자라 주변에 성벽도 엄청 높이 쌓았던 시기가 있었다. 물론 지금도 종종 자기만의 동굴에 가끔은 들어가기도 하지만 곧 얼마 지나지 않아 좋은 친구들이 끄집어 내주는 덕분에 동굴생활은 길지 않다. 난독증으로 인해 글 읽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기피하던 그때는 글씨를 쓰는 것마저 쉽지 않아 삐뚤빼뚤한 공책을 친구들에게 내보이는 걸 자존심 상해했다. 그래서 손으로 가릴 수 있는 만큼 가리면서 글씨를 쓰고 뭔가 발표를 해야 할 시간이 되면 갑자기 화장실 가고 싶다고 슬그머니 교실 밖을 나서는 아이 때문에 담임 선생님도 항상 안타까운 마음이셨다. 조금만 더 자신감이 붙으면 좋으련만. 조금만 더 씩씩하면 좋으련만. 그건 그냥 엄마인 나만의 바람이었다.


그래서 썼던 방법은 엄마가 대신 씩씩해지기.

빨간 비가 우수수 내린 시험지가 가방에서 나왔다. 잔뜩 구겨진 채 한 두장이 아니다. 그래서 나는 내 딸에게 10점, 20점 받은 시험지도 엄청나게 호들갑을 떨며 칭찬을 했다. 솔직히 잠깐 동안은 한숨이 나왔지만 이내 내 눈치를 보는 딸을 보면서 일부러 더 크게 웃으면서 아무것도 아닌 척 대단하다고 글씨가 많은데도 이 정도로 점수받는 게 쉬운 일이 아니라고 엄청 칭찬을 했다. 그 이후로 나는 별 거 아닌데도 호들갑을 떠는 엄마가 됐다. 내 딸이 체육대회 달리기에서 3등을 해서, 모든 아이들의 그림이 걸리는 시화전 한가운데 내 딸 그림이 걸려있어서, 친구들과 같이 떡볶이 먹고 싶지만 참고 학원부터 먼저 가서, 심지어는 중학교도 집에서 가까운 곳으로 배정받은 것까지 칭찬을 하기 이르렀다. 그 당시 내가 가장 많이 한 이야기는, 엄마는 공부 잘하는 거 중요하지 않다고. 성실하게 학교 다니고 졸업하는 것. 선생님의 칭찬도 좋지만 열심히 하는 모습 보여주는 네가 엄마는 너무 자랑스럽다고. 의무교육까지만 다녀도 엄마는 너무 감사하다고. 고등학교, 대학교까지 가는 네 모습 상상만 해도 뿌듯하고 좋지만, 지금 최선을 다해 학교 다니는 네가 엄마는 너무 대견하다고 그렇게 말했다.

아프지만 결석하지 않고 혼자 병원 다녀와 지각이지만 교실로 들어가는 아이의 뒷모습을 보면서 조금씩 자신감과 자존감을 회복하는 것 같았다. 더불어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어느 정도의 책임감이 있어야 한다는 것도.

그렇게 조금씩 한 발 한 발 아이와 나는 같이 커갔다. 졸업식 때는 누구보다 열심히 축하를 해주었고, 무슨 일이 생기든 너의 가장 든든한 빽인 엄마가 있다고, 네가 뭘 하든 가장 먼저 너의 곁에서 너만의 튼튼한 성이 되어주겠다고.

열심히 여행도 다녔다. 먼 곳으로 오래 머물지는 못해도 가까운 곳으로 자주 좋은 것들 보고 맛있는 거 입에 넣어주며. 아무래도 등 따시고 배부르고 기분 좋으면 뭘 해도 자신감이 붙고 결과에 상관없이 덥석 시작할 수 있는 힘이 생길 것 같아서.

친구들 대여섯 명을 집으로 데려와도 우리 부부는 최선을 다해 접대(?)에 모든 열정을 쏟았다. 아이 친구들이 우리 집에 언제든 편안하게 놀러 올 수 있도록. 그래서 또 다른 아지트가 되었으면 싶어 파자마 파티부터 시작해 생일파티도 자주자주 열어주었다. 지금도 우리 집을 편하게 생각해 자주 오는 내 딸의 친구들에게 고맙다. 아이들에게 편안한 엄마가 되기 위해 언제든 떡볶이 정도는 만들어 줄 수 있는 재료를 냉동실에 재우면서 나는 또 다짐해 본다. 신이 모든 곳에 있을 수 없어서 어머니를 보내주었다는 그 말처럼 네가 엄마의 모든 세상이듯 엄마도 너의 모든 힘든 상황에 함께 있을 거라고.


너무 열심히 응원을 하면 잠깐 나의 자아도 상실되는 기이한 체험을 하기도 한다. 내가 나를 놔버리는 그런 순간. 아이를 위해서라면 못할 것 없는 나는 아이 앞에서 가끔은 막춤을 추기도 하고 아이처럼 어리광을 부리기도 한다. 형제가 없는 내 딸은 그런 모자란(?) 엄마를 챙기기 바쁘다. 마치 모자란 언니를 둔 야무진 동생처럼 말이다. 조금 웃기는 상황이지만 나이가 들수록 내 기억력도 점점 상실해 가는 횟수가 잦아져 딸의 도움이 어떨 땐 너무 시기적절할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손에 핸드폰을 들고 핸드폰을 찾아 사방 헤맨다거나, 머리 위에 올려놓은 안경을 잊고 안경 없어졌다고 난리인 그런, 지나고 나면 웃음만 나는 상황들.

내 딸은 머리가 굵어지며 점점 엄마를 챙기는 횟수가 늘어나고 나는 그런 딸을 믿고 자신 있게 외출도 한다. 웃픈 상황은 매일 생겨나지만 어쨌거나 이제 내가 챙기는 것보다 내 딸이 스스로 챙기는 게 당연한 이런 날이 내게도 온다는 게 믿어지지가 않는다. 사실 품 안에 자식이라고 내 딸로 있을 땐 마냥 어리게만 보이지만 사회 나가면 당당한 20대인 것을. 이제 나도 조금씩 아이를 놔주는 연습을 해야 한다. 사회인으로서 당당한 내 자식의 어깨에 자신감 듬뿍 얹어 내보내고 싶은 엄마의 마음은 다 똑같으니까.

그러기 위해 나는 오늘도 아이의 긍정적 자아에 또 한 번 힘을 줘 내보낸다.

우리 딸 진짜 무슨 옷을 입어도 최고 이뻐버리네에~
엄마보다 옷 고르는 안목이 훨씬 있어, 좋아.
오늘도 행복하게 하루 보내고 와~
무슨 일 있음 엄마랑 아빠한테 전화해.
엄마 당장 달려갈 테니까!

엄마의 응원을 영양제 삼아 내 딸이 더 이상은 동굴 속으로 숨지 않고 겁내지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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