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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와 학교수업

by 채채

초등학교 때는 세월호 사건으로 인해 수련회 한번 못 가보고, 중학교 때는 사스 때문에 간신히 마지막으로 한번 단체 수련회를 가보고는 코로나를 맞았다. 당연히 수업도 참석이 어려운데 수련회고 체험학습이고 다 미뤄지다 나중엔 아예 없어져 버렸다. 졸업식도 학교 운동장에서 졸업앨범만 나눠주고 허무하게 끝나버렸으니까.

그래서 대학교 때는 입학식이고 졸업식이고 웅장하고 멋지게 해주고 싶었지만 뭐 그건 극 I에 A형 혈액형을 가진 엄마가 꾸는 원대한 꿈일 뿐이었다.

그야말로 비운의 2000년에서 2005년생들이다. 나 역시 수학여행이고 MT고 한 번도 안 가봤기 때문에 막연한 호기심과 동경 혹은 기대감이 있었는데 내 딸은 한번 펼쳐보지도 못하고 꿈같은 학창 시절의 추억을 고이 접게 되었다. 그래도 대학교에서 만난 친구들과는 봄 여름 가을 겨울 춘천으로 부산으로 일본으로 줄기차게 여행을 다니긴 하니 다행이라 할지 너무 여행을 많이 다녀 허전하다 해야 할지. 역시 사람 맘은 참 요랬다 조랬다 변덕스럽다.


코로나로 학교수업은 화상으로 진행했다. 아침마다 겨우 눈곱만 떼고 일어나 상의는 교복을 하의는 잠옷을 입고 컴퓨터 앞에 앉아 학교 수업을 받는다. 그마저도 제대로 된 강의라기보다는 담임 선생님께서 줌으로 출석체크만 하고 교육청에서 학과진도에 맞춰 만든 동영상 강의를 보는 것이 다였기 때문에 수업의 질이 좋을 리 없었다. 덕분에 아침점심저녁 삼시세끼 해다 나르느라 나 혼자 바쁜 하루, 받아먹는 넘은 천하태평이다.


학교수업에 맞춘 동영상 수업이라고 하지만 많은 학교의 아이들이 동시에 보고 있기 때문에 가끔 오류가 생기기도 해서 수업시간이 통째로 대기시간으로 날아가기도 하고 출석체크만 하고 각자 개인자습을 하는 날도 있었다.


당연히 수업진도는커녕 집중도도 떨어지고 학원도 다니지 않던 내 딸은 점점 학습적으로 고립되는 상황이 되었다. 간간히 아니 자주 담임선생님께서 확인 전화를 주시긴 하지만 그때 당시에는 특수반 수업을 포기한 상황이기 때문에 다른 선생님께 도움을 받을 수 없었다. 하루 이틀, 한 달이 되자 조바심이 난 나는 학원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야간자율 학습에 참여하면서 조금씩 자기만의 공부법을 만들어 가던 내 딸은 코로나로 고등학교 2학년을 통째로 날리게 되었는데도 만나지 못하는 친구들과 지지고 볶고 싸우고 화해하고 할 건 다 하더라.


학원을 다니지 않던 아이들도 학교 수업이 이러니 어쩔 수 없이 학원으로 빠지던 때라 특별히 말을 얹지 않아도 학원을 가야 하나 고민하기에 분위기를 몰아 슬쩍 학원 등록을 시켰다.

처음엔 만나지 못하던 친구들을 학원에서 만나니 그 맛에 열심히 다니더니 아니나 다를까 일주일이 지나자 낙오되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아이들이 한꺼번에 수업받으니 학교와는 다르게 이해 안 되고 모르는 내용이 나와도 묻지 못하고 그냥 어영부영 넘어갔던 모양이다. 학원 선생님을 붙들고 이해가 될 때까지 묻고 또 묻는 내 딸을 학원에서는 조금 난감해했고 결국은 같은 내용의 수업을 남아서 두 번씩 듣게 되었다. 몰라서 묻는데도 선생님은 문제집만 풀라고 시킨다며 한동안 화만 내던 아이는 어느 날 학원을 안 가겠다 선언했다. 그리고는 영어와 국어 과외를 시작하게 되었다. 수학은 오로지 나하고만 하고 싶다고 했고 다행히 아이가 어릴 때 수학학원을 운영하며 수학강사를 했던 것이 교과과정이 크게 달라지지 않아 어려운 결정은 아니었다.


영어 선생님은 파닉스가 아직도 서툰 내 딸에게 문법이 문제가 아니라며 요즘 초등도 안 하는 파닉스부터 가르치셨다. 자주 헷갈려하나 파닉스와 단어는 혼자서도 틈틈이 외우고 공부하고 있기 때문에 내신과 수능에 신경 써 주십사 했지만 선생님은 완고하셨고 결국 교육방향이 달라 그만두게 되셨다. 조금 모자란 부분은 따로 공부해도 된다 말씀드렸는데 결국 고집을 꺽지 않으셨고 영어마저 엄마인 내 차지가 되었다.


국어는 다행히도 선생님께서 난독증의 어려움을 이해해 주시고 학교진도에 맞춰 차근차근 수업해 주셨다. 은근 걱정했던 제2 외국어는 일본어였는데 어릴 때부터 지브리, 호소다 마모루, 신카이 마코토 같은 감독들의 애니를 자주 보여줘서 일본어에 대한 관심이 있어서였을까, 저항 없이 받아들여 히라가나, 가타카나를 열심히 외우더니 아직까지도 틈틈이 서점에서 학습지를 사다가 공부하고 있다. 나중에 일본으로 워킹홀리데이를 가겠다는 원대한 꿈을 품고서.


가장 넘기 어려운 적은 내 딸이 가장 싫어하는 수학. 초등 고학년 때 1차 방정식을 배워야 할 나이에 내 딸은 분수를 배웠다. 2차 방정식은 중 3이 돼서야 하게 되었고 그 사이에 도형과 확률은 맛만 보고 지나갔다. 고등학생이 되자 문과 수학을 하게 되었는데 다행히 내 딸은 암기력(?)이 좋아 수학도 암기 과목이라는 것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사실 자주 나오는 문제 패턴이 있으니 기본 점수만 받자는 마음으로 풀이를 달달 외우게 했다. 같은 공식을 쓰는 문제라도 숫자가 다르고 도형이 다르게 나올 땐 어쩔 수 없었지만 계속 외우니 비슷한 문제가 나오면 거기에 맞춰 식을 살짝 바꿔서 답을 도출해 내기에 이르렀다.

역시 수학은 암기과목이었다며 70점이라는 고득점을 받아 온 내 딸에게 인간 승리의 박수를 쳐 줄 수밖에 없었다.


사회과학 과목들은 인강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EBS는 기본, 친구들이 많이 선택하는 인강보다는 본인에게 맞는 선생님이 있는 인강을 선택해 꾸준히 공부했고 기본기를 다지는 데는 EBS가 가장 도움이 많이 됐다고 한다. 나는 화학공학과를 졸업했기에 수학과학은 도움을 줄 수 있으나 사회문화나 지리 같은 과목은 눈뜬 봉사나 다름없어서 침대에 걸터앉아 인강 듣는 내 딸 뒷모습과 함께 모니터를 노려보는 것 밖엔 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서두르지 않고 차근차근 공부하다 보니 뜻밖의 암초도, 지름길도 골고루 만났다.

공부에는 왕도가 없고 선배 엄마들 얘기처럼 엉덩이 싸움이 최고.

의자에 궁댕이 딱 붙이고 앉아 꼼수는 커녕 한 길로만 가다 보니 대학도 가게 되었다.

인서울이 아니라 미안하다는 딸에게 나는 또 한 번 호들갑을 떨어야 했다.

내 딸을 무시하고 힘들게 했던 아이들은 그보다 못한 대학을 가거나 재수를 한다고 들었기 때문이다.

여러분도 알잖는가.

재수를 한다고 해서 무조건 더 나은 학교로 진학한다는 법은 없고 오히려 더 안 좋은 결과를 맞는 경우가 많다는 걸.

속없는 에미의 맘이 이렇다.

정작 내 딸은 신경도 안 쓰는데.


난독이 있어도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한 발 한 발 신중하게 발걸음 하는 내 딸이 너무 기특하다.

이제는 내 딸의 모든 날에서 조금씩 멀어지는 준비를 할 시간이다. 스스로 결정하고 알아서 행동하는 그런 시기가 이미 와있었는지도 모른다.

엄마의 맘으로 외면하고 있었을 뿐.

세상 모든 부모가 똑같겠지만 나도 내 딸이 어른이 되어가는 그 소중한 한 발자국이 참 눈물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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