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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연못 Aug 02. 2020

목에서 쇳소리가 나지 않는 시간

[나를 나답게 해주는 것]

허스키한 쇳소리가 났다. 그게 뭐 그리 긴장할 일이라고. 테스트 버전으로 만드는 영상에 몇 문장 녹음하는 것뿐이었고, 어딘가에 업로드 되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야말로 테스트 영상이었다. 그러니 전문 성우가 아닌, 나 같은 실무 관계자가 휴대폰으로 녹음하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혼자 물 마시고, 목 다듬고, 녹음하고, 지우고, 다시 읽어보고, 또 녹음하기를 수차례 반복하고 있었다. 그러는 동안 목에서는 계속해서 쇳소리가 났다.


긴장하면 그렇게 쇳소리가 났다. 사람들 앞에서 발표 비슷한 것을 해야 할 때도 그랬다. 아무리 물을 마시고 목을 가다듬어 봐도 소용없었다. 그 긴장되는 순간이 끝나야만 비로소 목소리가 평소대로 돌아왔다. 듣는 사람들은 잘 모르겠다고 해도, 스스로 얘기하는 내내 거슬리고 불편하니 의식할 수밖에 없고, 의식하면 할수록 목은 더 거칠거칠해지곤 했다.


더 이상 나아질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을 즈음, 사실 처음이나 수십 분이 지난 다음이나 대동소이하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마음에 위안이 될 만한 시간이 지났을 즈음 담당자에게 조용히 파일을 보내고는 모른 척 폴더를 닫아 버렸다. 두 번 다시 그 파일의 목소리를 듣고 싶지는 않았다. 




언젠가 오후에 미팅이 있는 날이었다. 개인 일상을 담는 영상 제작 관련 미팅이었는데, 촬영할 대상자를 만나 이런 저런 질문을 던져가며 어떤 내용들을 영상에 담으면 좋을지 채집하는 일이었다. 상황에 따라 미팅에서는 역할이 분담되기 마련이고, 개인적으로는 옆에서 조용히 듣고 적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었지만, 안타깝게도 이번에는 그런 역할은 아니었다. 주도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대화를 이끌어가고, 그림을 그려가야 하는 역할이었다. 일이라는 것이 좋아하는 역할만 배정받을 수는 없는 것이니 어쩔 수 없긴 하지만, 못내 애석하긴 했다.   


나름 끌어올린 목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해맑은 웃음을 지었고, 존중의 눈빛을 던졌다. 처음 만난 긴장감을 누그러뜨려보겠다고 어색한 칭찬과 사전에 공부한 내용들을 꺼내보다가 마뜩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는 이내 질문지로 눈을 돌렸다. 이때도 어김없이 목에서는 쇳소리가 났지만,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테니 그저 한껏 톤을 높여 대화를 이어나갔다.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최선을 다해 집중하고, 너무너무 궁금하다는 눈빛도 발사하고, 손을 어깨 높이에서부터 가운데로 모으며 양손을 꼭 쥐는 식의 리액션을 보이기도 했다. 질문을 던지고, 답변을 부지런히 적고, 적으면서 다음 질문을 생각하고, 사이사이 적절한 반응도 보이다보니 한 시간이 훌쩍 지나있었다. 


슬슬 마무리를 짓고는 예의 바른 모습으로 인사를 건넨 뒤 해당 장소에서 나온 후, 그 장소에서 함께 나온 다른 관계자들에게 한 번 더 예의 바르게 인사하고는 드디어 홀로 조용히 버스를 탔다. 두 시간 좀 안 되는 미팅만으로 하루에 쓸 에너지를 다 쓴 것 같은 느낌에 마음까지 턱 내려놓고는 칼칼해진 목을 몇 차례 큼큼 거렸다. 




마침 미팅 장소가 부모님 집 근처였기에 잠깐 들렀다. 오랜만에 아들 온다고 때도 안 된 저녁상을 차리신 덕에 멍해 있었던 공백을 고기와 밥으로 채웠다. 한 결 같이 묻는 ‘밥은 먹고 다니냐’는 질문에 ‘그럼 굶고 다니겠어’라는 성의 없는 대답으로 받아치고는 내심 죄송한 마음에 밥 맛있다는 실없는 소리를 건넸다. 이 실없는 소리도 허투루 듣지 않으시는 어머니는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것처럼 반사적으로 반찬을 그릇에 더 담으시고는 또 한 번 ‘많이 먹으라’는 한 결 같은 레퍼토리를 꺼내셨다. 


밥을 먹고, 과일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동안 묻지도 않은 일상들을 시시콜콜 늘어놓고 있었다. 얘기하는 동안 쇳소리는 전혀 나지 않았다. 부모님은 진심으로 궁금해 하셨고, 재미있어 하셨고, 걱정하셨다. 나도 거기에 맞춰 웃으며 얘기했다가, 짜증도 냈다가, 진중해지기도 했다. 편안했다. 오전부터 내내 긴장하고 있었던 상태가 어느새 모두 풀려 있었다. 어색한 표정,  어설픈 계산들, 어느 것도 존재하지 않았다. 마음도 몸도 모두 참 편안했다.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내가 기분이 좋아 보인다는 말과 함께 맞아주었다. 아침에 미팅 걱정하더니 잘 되었냐는 이야기가 이어졌는데, 일이 순조롭게 끝났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랜만에 만난 부모님과 30여 년간 살았던 옛 집의 분위기가 위로해준 덕이었다. 아내는 웃으며 “그러니 부모님께 자주 연락드려”라는 말과 함께 차를 한 잔 내주었다. 순간 30여 년의 세월 못지않은 익숙함과 편안함이 느껴졌다. 거실에 아무렇게나 앉은 아내와 내가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어깨에 힘 들어갈 일 없는 이 공간과 시간이 담담하게 힘을 채워주고 있었다. 순간순간 쇳소리 내며 소진했던 기운을 회복시켜주는 느낌이었다. 늦은 저녁, 가족 안에 앉아 오롯이 ‘나’로서의 시간을 채워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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