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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연못 Aug 14. 2023

우리 여정에도 세월감이...

오랜 비행과 첫날 사건의 긴장 덕에 쓰러지듯 잠이 들었지만, 새벽 5시도 안 되어 눈이 떠졌다. 여행 시차. 이렇게 제대로 느껴보는 것은 처음 같았다. 어디서든 머리만 대면 잠이 들었기에 필요한 시간에 잠들 수 있었고, 그 순간까지 버틸 수 있는 체력도 있었던 것 같은데 이번에는 달랐다. 영 달랐다. 아무런 운동도, 관리도 하지 않는 사십 대 중반의 몸은 예전 기억과 전혀 같지 않았다. 아무리 오래 비행기를 타고 왔어도 내리자마자 여행 모드를 가동할 수 있다는 자신감은 환상 속 신기루와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멍하니 침대에 앉아 '마지막 3년 전 여행에서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라는 생각을 하다가 최근 여행들이 모두 가까운 아시아권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런 제대로 된 시차를 겪을 새도 없이 육체는 차곡차곡 나이를 먹고 있었다. 


아내도 멀뚱멀뚱이었다. "잘 잤어?" "응, 그런 것 같아." "그런데 좀 피곤하지 않아?" "응, 피곤해. 그런데 잠을 더 잘 수가 없네." 둘이 힘없이 얘기를 나누다가 창문 밖을 슬쩍 보았다. 아직 어둑어둑했다. "어차피 더 못 잘 것 같은데, 불 켤까?" 불도 켜고 TV도 켰더니 다시 몇 시간 전의 저녁이 된 것 같았다. 잠을 자고 일어난 건지, 자려고 누운 건지. 의미 없이 TV 채널을 돌리다가 우리나라 아침 방송 같은 채널에 고정했다. "어느 나라나 아침에 하는 프로그램은 비슷한가 봐?" 가볍게 시시덕거리다가 방 안에 있던 커피 기계로 커피를 내렸다. "오늘은 어디로 가나?" "여기서 가까운 곳에 스타벅스가 있는데, 일찍 연대. 일단 거기서 아침 먹을까?" "좋아." 그렇게 둘에게 어제 사건 따위는 이미 스리슬쩍 지나간 일이 되었고, 오늘 여행을 즐기자는 마음이 새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이 날의 주요 일정은 11시에 예약한 오르세 미술관이었다. 파리에 도착하고 다음날 가는 것이니만큼 여유 있는 시간으로 예약해 놓았었다. 오랜 비행 등으로 피곤할 테니 아침 9~10시나 되어서 일어나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피곤한 것은 맞췄지만 기상 시간은 맞추지 못한 결과가 되었다. 예상보다 무려 4~5시간이나 일찍 일어나다니.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플랜B를 찾아본 후 느릿느릿 외출 준비를 이어갔다. 



7시 정도에 호텔을 나섰다. 스타벅스는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였다. 우린 최대한 여유 있게 걸었다. 3월 말의 파리 아침은 쌀쌀했지만, 팔짱을 꼭 낀 채 걷던 우리는 한적한 이른 아침 거리가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쓰레기 더미로 지저분한 곳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파리였다. 예스럽고 멋스러운 건물들을 구경하며 조용한 거리를  둘이 함께 거니는 것이 하루의 시작으로 꽤나 괜찮게 느껴졌다. 서서히 밝아오는 공기, 사람들로 북적이기 직전의 활기찬 고요함. 여행지에서 드디어 신이 난 우리는 둘만의 포토타임을 가지며 이제야 밝게 웃을 수 있었다. 


스타벅스 카푸친스점은 한 번쯤 둘러볼만했다. 내부를 프랑스의 궁전처럼 꾸며놓았는데, 우리나라에 한옥으로 만든 스타벅스가 있다면 한 번쯤 들러보고 싶은 그런 느낌? 미술관 예약 시간까지 아직도 시간이 많았던 우리는 이후 이에나 시장에서 과일도 사 먹고, 센 강을 따라 한참을 걷고 구경하며 오르세 미술관으로 향했다. 


돌이켜 보면 센 강을 따라 걷던 30~40분이 파리에서 가장 낭만적이고 활기찬 시간이었던 것 같다. 이른 아침의 한적한 산책에 대한 여운도 남아있었고, 파리 여행에 대한 작은 기대감도 다시 차올랐고, 체력도 소진되기 전이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오전의 햇살도 좋았고, 센 강 주변의 도시 풍경도 멋있었다. 걸을 때마다 하나씩 등장하는 으리으리한 건물과 다리 등이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했고, 이런 길을 따라 걷는 것이 여행할 맛이라고 느껴지기도 했다. 살짝 멀찌감치 보이는 에펠탑을 배경으로 사진 찍기도 잊지 않았다. 우리의 에펠탑 구경은 그 지나가며 보았던 몇 분이 다였지만 괜찮았다. 남은 사진을 보니 너무 바람 부는 순간에 찍은 것이라서 살짝 아쉽기도 했지만. 



우리는 그렇게 걷고 또 걸었다. 9년 만에 나선 유럽여행에 취해, 우리가 함께 한 시간을 특별하게 기념하고 있다는 것에 취해 쉬지 않고 이곳저곳 걸으며 함께 했다. 이른 아침의 골목길, 시장, 강가의 산책길, 미술관 등 몽글몽글한 마음이 차오르도록 함께 걸었다. 즐거웠다. 하지만 행복한 시간을 오래 영위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곧 깨달았다. 여행 시차를 고스란히 느끼게 된 육체가 10km 훌쩍 넘는 걷기 훈련에 반응하지 않을 리 없었던 것이다. 늦은 점심식사 후 4시쯤 호텔로 잠깐 쉬러 왔던 우리는 저녁 계획을 모두 꿈속에 묻고 말았다. 방에서 대자로 뻗었던 우리는 잠깐 일어나 간신히 주변 구경에 나서 보았지만 몇십 분 만에 다시 기어 들어왔고, 이후 저녁 식사도 포기한 채 침대와 혼연일체가 되었다. 


우리의 10년 차 동행을 기념하며 유럽까지 머나먼 여행을 떠나올 때 별과 같은 설렘과 기대는 있었지만, 육체를 관통한 수년의 세월에 대한 대비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었다. 둘의 여정이 감사하면서도 살짝 서글퍼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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