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비행 뒤 지루한 기다림 끝에 수속과 캐리어 찾기까지 마친 우리는 유유히 공항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그때 가벼운 수다 중이던 경찰 무리가 다가왔다. 무려 3명씩이나 다가오더니 그중 1명이 현금을 얼마 갖고 있느냐고 물었다. 당연히 영어였다. 실컷 한국어로 떠들던 우리는 순간 당황했고, 서로 얼굴을 쳐다보며 "우리가 현금을 얼마나 갖고 있지?"라고 물었다. 순간, 제대로 계산할 틈도 갖지 않은 채 난 무심코 "about ten thousand euro..?"라고 답했다. 머릿속으로 생각한 숫자는 '1천 유로'였다. 우리는 여행 경비를 모두 현금으로 환전해 왔고, 그 금액이 100만 원 정도였으니, 대충 그렇게 대답하면 될 것 같았다. 하지만 실제로 입 밖으로 꺼낸 대답은 '1만 유로'가 되어 있었다. 1천만 원이 넘는 현금을 수중에 갖고 있다고 대답한 것이다. 이 간극을 깨닫기도 전 경찰은 우리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보였고, 바로 옆 작은 공간으로 쭈뼛쭈뼛 들어가게 되었다.
사실 경찰은 친절했다. 현금을 1만 유로 이상 갖고 있으면 세관에 신고를 해야 한다는 한국어 안내문까지 보여주었고, 자신들의 할 일을 성실히 이행하고 있을 뿐이었다. 경찰은 그들의 할 일을 위해 우리에게 갖고 있는 현금을 모두 꺼내라고 했고, 그들의 방식대로 지폐를 한 장 한 장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천천히 세기 시작했다. 그때까지도 난 어안이 벙벙한 상태였다. '음? 이게 무슨 상황이지?' 그리고 아내는 그라데이션으로 분노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일정별로 정리해 놓은 지폐를 왜 몽땅 꺼내서 헤집어 놓는 거야?' 잠시 뒤 경찰은 "너희 1만 유로 없는데?"라며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았고, 난 "어, 그러네, 없나 봐"라며 얼빠진 웃음을 지어 보였다. 지갑을 챙기며 아내는 내 어깨를 툭 치면서 "우리가 무슨 1만 유로가 있어. 1천 유로가 있는 거지."라며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인지 깨우쳐 주었다. 그런 우리를 보며 경찰들도 가볍게 웃어 보였고, 우리는 안도의 마음으로 별 일 없이 공항을 나설 수 있었다.
순간 '여행이 시작됐다!'라는 생각과 함께 살짝 짜릿한 느낌이 들었다. 예상치 못한 해프닝이야말로 여행의 백미였고, 요런 해프닝은 사람들에게 재미나게 얘기할 만한 에피소드를 얻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심지어 큰 사고도 아니었고, 스스로 멍청하다는 것만 인정하면 얼마든지 신나게 떠들만한 예능적 요소였다. 코로나 기간 동안 느낄 수 없었던, 해외여행지에서의 에피소드를 여행 시작과 동시에 만나게 되어서 난 막 신이 나려고 하고 있었다.
하지만 아내의 얼굴을 보는 순간 철없는 들뜸은 조용히 내려놓기로 했다. "아, 왜 정리해 놓은 것을 망가뜨리냐고. 왜 아무도 안 잡더니 우리만 잡는 거야, 왜?" 아내는 나와는 정 반대편의 감정선에 가 있었다. 한껏 날카로워진 아내는 호텔로 향하는 몇십 분 동안에도 감정이 누그러지지 않았다. 택시를 타고 가며 보이는 풍경에 대한 감상을 나누며 기분을 풀어보려 했지만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오히려 중간중간 갑작스레 무서우리만치 쏟아지는 폭우로 인해 기분이 더 가라앉았고, 파리 외곽 도시의 정리되지 못한 환경들을 보며 경계심마저 높아졌다. 파리 시내로 들어오자 거리마다 쌓여있는 쓰레기 더미들도 눈에 띄었다. 연금개혁 반대 파업으로 인해 청소부들이 쓰레기를 치우지 않아서 그런 것이었는데, 한국을 떠나오기 전부터 뉴스에서 보던 걱정스럽던 풍경이 눈앞에 실제로 나타난 것이었다.
여러모로 아내에게 파리는 사전조사부터 시작해서 처음 마주한 인상까지 부정적인 것 투성이었다. 파리에서 정말 여행을 하는 것이 맞나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그 와중에 내가 던져본, "보통 공항에서는 무작위로 검문해 보잖아. 이번에는 그 무작위에 우리가 들어간 것뿐이지, 뭐"라는 이야기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 뒤로도 할 수 있는 아무 말이나 던지면서 시간이 흘렀고, 아내는 눈치 보는 남편에게 내심 미안해 화를 좀 풀었다. 그러는 동안 날은 제법 어두워져 있었다. 낯설 뿐만 아니라 불쾌하기 짝이 없는 파리에서 첫날부터 어두운 거리를 헤매고 싶지는 않았기에 호텔 근처 빵집과 편의점에서 간단히 먹을 것을 사 와서는 호텔 방에서 저녁식사를 해결했다.
여행이 시작되고 있었다. 같은 사건을 전혀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2명이 꼭 같이 하고 싶다며 떠나온 여행의 시작이었다. 결혼할 때 무수하게 들어온 "서로 다른 사람이 만나 하나의 가정을 이루게 되었다"는 상투적인 멘트가 왠지 다시 한번 와닿는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