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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연못 Aug 14. 2023

출발 전 소소한 설렘들, 그리고 사건의 시작

다행히 야근은 하지 않았다. 긴 휴가를 떠나기 전 종종 발생하는 일이지만 이번에는 피해 갈 수 있었다. 약간의 눈치를 받긴 했지만 이 정도면 굉장히 부드러운 편. 직장인들의 휴가는 언제쯤 온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인지. 


퇴근 후 바쁘게 떠날 채비를 마무리했다. 캐리어에 필요한 것들을 차곡차곡 쟁여 넣고, 빠뜨린 것은 없는지 잠깐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다. 고민의 시간이 길수록 챙겨가는 것은 많아지지만 무게 또한 무거워진다. 그리고 한 사람이 자기 짐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다른 한 사람이 해야 할 집안일의 몫이 늘어난다. 이 균형을 잘 맞춰가며 짐을 싸야 쓸데없는 불화가 생기지 않는다. 몇 해 만에 챙기는 캐리어였지만 우리는 이 균형의 지점을 몸에 익히고 있었고, 톱니바퀴 돌 듯 착착 진행되었다. 각자의 짐이 마무리되는 시점에 한 사람은 설거지 후 그릇들도 말려놓고, 한 사람은 청소기를 돌린 후 쓰레기통도 비워놓는 등 리듬감 있게 시간이 흘러갔다. 그나저나 왜 오래 집을 비우기 전에는 꼭 이렇게 청소를 해 놓아야 된다는 생각이 자리 잡고 있는 것인지. 결국 부모님 영향인가 싶기도 하고. 


이번에는 평소보다 조금 더 신경 쓸 일이 남아있었다. 여행기간 동안 친구가 우리 집에 머무르기로 했기 때문이다. 고양이를 돌봐주기로 한 것이었다. 홀로 남을 고양이녀석을 어찌할까 고민하다가 고양이 호텔을 예약했었는데, 우연히 친구와 이야기하던 중에 친구가 기꺼이 우리 집에서 며칠 지내면서 고양이를 돌봐주겠다고 해 준 것이다. 얼마나 고마웠던지. 고양이가 워낙 밖에 나가는 것을 싫어해서 호텔로 이동하는 것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것 같아 걱정이었는데, 친구 덕에 편하게 지낼 수 있게 되었다. 아내는 우리 집에서 기꺼이 머물러주기로 한 귀인을 위해 최대한 호텔급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다. 침구류도 싹 바꾸고, 수건과 슬리퍼 등도 새것으로 준비했다. 와이파이 비밀번호와 TV 사용법까지 집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안내도 꼼꼼히 정리하여 프린트해 놓았다. 



1주일 집을 비우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늘 생각보다 많았다. 그렇다고 하기 싫은 일은 전혀 아니었다. 기꺼이 수고할 수 있었고 잠자는 시간도 내줄 수 있었다. 당연히 자정을 훌쩍 넘어 잠자리에 든 우리는 새벽에 일어나야 했다. 비행기가 오전 출발이기 때문이었는데, 잠이 부족하다는 생각도 없이 벌떡 일어나 부지런히 공항으로 향했다. 계획보다 일찍 공항에 도착한 덕에 캐리어 바퀴도 수리할 수 있었다. 캐리어 중 하나가 바퀴 고장으로 덜덜거렸는데, 찾아보니 인천공항 지하에 캐리어 바퀴 수리하는 곳이 있었다. 여행 내내 불편할 것 같아 걱정이었는데 깔끔하게 해결되어 출발이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심지어 수리한 바퀴는 사장님의 노하우가 담긴 바퀴였는데, 기존보다 부드러워서 멀쩡한 캐리어까지 교체하고 싶은 충동이 일 정도였다. 


떠나는 비행 편은 약간의 비용을 더 지불하고 이코노미 좌석 중 가장 앞에 있는 좌석을 예약했다. 덕분에 비즈니스 라운지도 처음 이용해 볼 수 있었는데, 여유롭게 라운지에서 약간의 식사를 하며 대기하는 맛이 어찌나 편안하던지. 이래서 '자본주의 만세'라고 하는 거구나 싶었다. 그리고 14시간의 비행마저도 편안했다. 마침 옆자리까지 비워진 터였기에 둘이서 마음껏 다리도 뻗고, 잠도 원하는 대로 뒤틀면서 자고, 필요할 때마다 일어나 스트레칭도 할 수 있었다. 비즈니스나 퍼스트 클래스도 아니고, 고작 가장 앞자리인 것만으로 이렇게 장시간 비행이 덜 피곤할 수 있는 것이었다니. 어쨌거나 우리의 10주년 여행을 이 편안한 장시간 비행으로 시작한다고 생각하니 왠지 모르게 흡족한 기분이 들면서 행복한 여행이 더 기대되었다.  


개운한 마음으로 샤를드골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미리 사둔 휴대폰 유심을 산뜻하게 갈아 끼우고, 순조롭게 택시에 올랐다. 공항에서 호텔까지 택시로 어느 정도 걸리는지, 어디서 타야 하는지, 비용이 얼마인지 모두 숙지하고 있는 아내의 안내에 따라 모든 것이 착착착이었다. 프랑스 중년 남성의 이미지가 그대로 묻어나는 택시 기사님의 사람 좋은 미소도 기분 좋은 여행을 알리는 듯했다.


이 모든 순간들이 아내의 계획대로 깔끔하게 진행되었으니 더할 나위 없는 10주년 여행의 시작이 될 수 있었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예상치 못한 작은 돌발상황 하나가 아내 기분을 깡그리 잡쳐놓았고, 우리는 호텔에 도착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날 때까지 분노와 눈치와 당황스러움이 뒤섞인 여정을 시작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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