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이후 이래저래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시간이 많아진 아내는 3주 정도 오롯이 여행 준비에 매달렸다. 직장을 다니는 중에 3주가 주어졌다 해도 준비에 결코 소홀함이 없었을 텐데, 몇 배나 많은 시간이 주어진 것이다. 한 치의 틈도 용납하지 않는 완벽한 계획을 짤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정보를 모으기 시작했다. 책, 블로그,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 대부분의 매체를 섭렵했다. 특히 처음 가보는 파리와 근교 도시를 중심으로 샅샅이 알아보았다. 바르셀로나는 우리의 추억 여행으로도 충분하기에 몇 군데를 추가하는 것 정도로도 마음이 가벼울 수 있었지만, 파리는 그렇지 않았다. 막연히 기대했던 곳을 어렵게 처음 가는 것이니 만큼 알아보는 것을 게을리할 수는 없었다.
알아볼수록 독이 되었다. 파리 골목은 낭만적이라는 평가보다 더럽다는 후일담이 훨씬 많았고, 널려있는 개똥을 피해 걸어 다녀야 한다는 파리지앵의 얘기도 흘려들을 수 없었다. 식당과 카페에서 동양인을 무시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살갑게 친절하지도 않다는 종업원 문화 또한 긴장되는 부분이었다. 그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고 적합한 언어와 제스처로 주문해야만 한다는 압박이 생겨났다. 소매치기 얘기는 절정이었다. 정상적으로 백팩을 멘 상태에서 몇 걸음만 걸어도 안에 들어있던 물건이 모두 사라질 것만 같은 장황한 주의를 시작으로, 순간 정신을 잃게 만들고 소지품을 훔쳐갔다는 전설적인 간증까지 여행을 두려움으로 가득하게 만들 정보들이 차고 넘쳤다.
안전불감증에 가까운 남편과 달리 아내는 낯선 곳의 바람 소리 하나에도 촉각이 곤두서는 성격이었다. '안전'이 삶의 모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만한 인물에게 파리에 대한 수많은 부정적 정보들은 잠자코 있던 모든 신경세포를 깨우는 계기가 되었다. 해가 진 뒤 에펠탑에 아무리 별빛 같은 불빛이 켜진다고 해도 그 야경 사진을 찍으러 밤거리를 나가서는 안 되는 일이 되었다. 평소 그렇게 좋아하는 반짝이는 조명이 수없이 켜진다 해도. 설상가상으로 파리에서 대규모 시위도 일어나기 시작했다. 연금개혁과 관련된 시위였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상황이 심각해졌다. 이미 여행 계획에서 야경 같은 것은 배제되고 있었는데, 이러다가는 초저녁부터 숙소 밖으로 한 걸음도 못 나가는 여행이 될 판이었다.
파리 말고 다른 도시로 가볼까 하는 안건도 수없이 논의되었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 일단 마일리지로 항공권을 구매한 것이 생각보다 큰 제약이었고, 박물관들을 예약한 것도 무료 취소가 되지 않았다. 파리를 가야 하나 가지 말아야 하나 하는 고민만으로도 수많은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거의 마지막이 되어서야 마음을 내려놓고, 파리 여행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아내 입장을 추측하기로는 혼자 가는 여행도 아니었고, 천하태평 남편은 다 괜찮을 거라고 하니 또 한 번 속는 셈 치고 가보자는 생각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막판 스퍼트만 남았다. 항공권, 호텔, 교통편 등을 다시 한번 확인하고, 하루하루의 동선도 체크했다. 하루 분량의 예산을 계산해서 전체 여행 경비 환전도 하고, 환전 지폐를 담을 분리형 지갑도 준비했다. 아코디언 파일이었던가? 아내가 그 물품을 구매하고 얼마나 신나 하던지. 공간이 여러 개로 분리되어 있는 그 작은 파일에 매일매일 쓸 경비를 날짜마다 나눠 담고, 그날그날 갈 곳의 박물관 티켓과 간략한 지도까지 모두 프린트하여 차곡차곡 정리했다. 샤를드골국제공항에서 숙소까지 택시비가 얼마인지도 사전조사를 끝냈고, 베르사유 궁전이나 몬세라트 같은 근교 지역 이동을 위한 교통편도 빠짐없이 숙지했다.
여행을 떠나기까지 뭐 이리 굴곡이 많은가 싶었다. 차분히 1년을 기다려 편안하고 행복하게 다녀오기를 기대하던 기념 여행이었는데, 일정은 급하게 바뀌고 현지 상황은 불안해지고 그에 따른 우리의 마음도 오르락내리락하고. 어수선해진 분위기 덕에 정신없이 시간에 끌려가는 느낌도 없지 않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정신을 차려 준비해야 할 것들을 챙기고 이 여행이 어떤 목적 아래 출발하게 된 것인지 기억하려고 애썼다. 특히나 아내가 부지런히 애쓴 덕에 여행 준비는 어느새 깔끔하게 마무리되어 있었다. 감사했다. 어떤 과정을 지나왔든 간에 이제는 떠날 일만 남아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