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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연못 Aug 14. 2023

여행 일정의 변수, 퇴사

1년 뒤의 여행은 잔잔하다. 하지만 3개월 뒤의 여행은 제법 일렁이게 된다. 마냥 구경만 하고 있었던 호텔도 예약을 걸어야 하고, 돌아다닐 일정도 어느 정도 가닥을 잡아야 한다. 물론 사람마다 이 분주해지는 시기는 다르겠지만 우리는 이 정도 기간에 오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호텔도 이 정도 기간은 남겨놓고 예약해야 적절한 가격에 괜찮은 곳을 잡을 수 있는 것 같았고, 여행 동선에 맞춰 일일투어 같은 것을 예약하기에도 기간이 어느 정도 남아있는 것이 유리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혹시나 일정이 바뀌어 취소하게 되더라도 남은 기간이 넉넉히 필요한 법이었으니까. 


1년이 남은 시점에서 3개월이 남은 시점까지는 꽤 시간이 흘러야 한다. 몇 달을 흘려보내는 동안 가끔은 여행을 진짜 가는 것이 맞나 싶은 순간도 맞이하면서. 그러나 이번에는 그렇게 정상적으로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여행이 10개월 정도 남은 시점에서 갑자기 3개월 뒤 여행으로 순간 이동을 시전했는데, 어려움을 이겨내고 항공권 일정을 변경한 탓이었다. 아내가 중요한 결심을 하게 된 것이 결정적 이유였다. 



여행 논의가 시작되고 약 한 달쯤 지난 시기에 아내가 퇴사를 마음먹었다. 10년 넘게 다닌 직장이었다. 꽤 오랜 시간 팀장으로 수고한 곳이었고, 내년에 회기가 바뀌면 휴가를 비롯해서 기존보다 나아지는 부분들도 기대하고 있는 시기였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너무 오랜 시간 마음고생을 하게 만든 원인이기도 했다. 아내 개인적으로는 삶의 의미를 생각하며 들어간 직장이었다. 정말 의욕적으로 일을 익혔고, 삶의 에너지를 수없이 쏟아냈다. 기대했던 의미의 순간들을 종종 마주하기도 했고, 보람찬 순간들도 잠깐씩 맛보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많은 한계의 순간들을 직면해야 했고, 자신을 보호하지 않고 온전히 내던진 결과로 공황장애라는 낯선 병을 만나야 하기도 했다. 


아내는 그곳에서 10여 년의 시간을 보냈다. 옆에서 지켜보던 나는 4~5년 전부터 아내가 쉬었으면 했다. 아내 마음이 망가지면서 육체까지 힘들어지는 상황들을 보게 되면서 많이 안타까웠기 때문이다. 잠시 직장을 그만두고 쉬면서 몸도 마음도 추스르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을 수시로 하게 됐다. 하지만 강하게 권고하지는 못했고, 아내도 쉽사리 그만 둘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여러 상황과 이유들이 얽혀 있었지만, 그중 큰 이유 한 가지는 경제적인 문제였다. 아내가 쉬었어야 할 타이밍에 앞서서 남편이란 사람이 먼저 쉬고 있었던 것이다. 한 번도 아니고 여러 번을.


나는 참 여러 번 직장을 그만두었다. 결혼한 뒤로만 세어도 네 번이나 되고, 그중 두 번은 제법 오래 쉬었다. 결혼하고 3년쯤 되어가던 시기에는 당시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8개월을 쉬었다. 모아놓은 것도 없었다. 대책도 없었다. 그저 그 직장을 더 다닐 수 없다는 감정뿐이었다. 그 감정을 정당화하기 위해 퇴근하고 집에 와서는 항상 회사에서의 부당함과 억울함을 토로했고, 그렇게 한참을 아내에게 징징댄 끝에 퇴사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다행히 빚이 많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넉넉한 것도 아니었다. 아내 한 사람의 월급으로 생활을 영위하기에는 녹록지 않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직장을 그만두었고, 오랜 시간 방황하며 세월을 하릴없이 버려댔다. 나보다 현실적인 아내는 잠을 제대로 못 잘 정도로 걱정이 많았고, 그 현실 앞에서 본인이라도 월급을 고수해 내야 한다는 책임감으로 끙끙댈 수밖에 없었다. 


그런 아내가 마침내 본인을 위해 쉬는 기간을 마련하기로 마음먹은 것이었다. 전적으로 공감했고, 아내의 마음이 평온해지고 새로운 도전들에 힘을 낼 수 있을 때까지 얼마큼의 시간이 흘러가던지 전적으로 응원하겠다는 마음으로 가득했다. 안타깝게도 아내는 퇴사하는 과정마저도 쉽지 않았고 무척 힘들었지만 결국은 빠져나왔고 털어낼 수 있었다. 


퇴사가 결정되고 마음이 조금 가벼워진 뒤 미래에 대한 생각들을 하나둘씩 나열하게 되었을 즈음 아내는 10주년 여행을 빨리 갔다 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여행을 계획했던 시기에는 휴식을 끝내고 새로운 직장을 갈 수도 있을 것 같았고, 새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된 곳에서 1주일이나 되는 휴가를 내는 것이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예상이 되었던 것이다. 


이 자연스러운 예측을 떠올린 순간부터 항공권을 다시 찾아본 아내는 아무래도 3개월 정도 뒤에 떠나야 할 것 같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마일리지로 구매 가능한 항공권의 일정 조율은 자유도가 매우 낮은 편이었고, 그나마 3개월 뒤에 운 좋게 우리가 가고자 하는 도시의 항공권 예약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어 보였다. 우리는 빠르게 결론을 내리고, 바로 항공권의 출발 날짜를 바꾸었다. 


이제 우리의 결혼 10주년 여행은 10개월이 남은 것이 아니라 3개월이 남은 것으로 변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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