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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연못 Aug 14. 2023

둘이 하는 여행, 둘이 사는 여정

셋째 날 시작은 순탄치 않았다. 베르사유궁전은 파리 외곽에 있었고, 지하철에서 외곽으로 나가는 노선을 실수 없이 갈아타고 가야 한다는 걱정에 이른 아침부터 서둘러 나왔다. 생각보다 노선을 갈아타는 것이 복잡하지는 않았는데, 예상치 못한 연착을 마주하게 되었다. 정확한 이유를 알 길이 없는 우리는 연금개혁 반대 파업 탓을 해보았지만 상황이 달라질 것은 없었다. 그 먼 곳까지 가는 다른 교통편을 지금부터 부랴부랴 알아보고 이동하자니 뭔가 마땅해 보이지가 않았다. 입장 시간을 예약해 놓았기에 조금 더 압박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다행히 40~50분 연착이 된다 해도 예약한 시간에 늦지는 않을 것 같았다. 혹시나 싶어 일찌감치 나온 것이 도움이 되었다. 플랫폼에는 우리 외에도 제법 많은 관광객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들도 연유를 모른 채 마냥 있어야 하는 처지는 똑같아 보였다. 어둡고 투박해 보이는 플랫폼은 지상에 위치해 있었고, 벽면 한쪽은 중간중간 트여있어 춥기도 했다. 3월 말 파리는 아직 쌀쌀했는데, 그날 아침은 날도 흐린 데다 바람도 많이 불고 있었다. 서둘러 나온 덕에 커피도, 아침도 모두 건너뛴 상태인 우리는 왠지 더 춥게 느껴지는 그 플랫폼에서 제법 긴 시간을 오들오들 떨어야 했다. 


누구에게나 유쾌할 리 없는 이 상황이 아내에게는 특히 더 불만으로 다가왔다.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못하고 부리나케 서둘렀는데 맥없이 기다려야 하는 것이 억울할 수도 있었고, 연착의 이유를 알아볼 수 없이 무력하게 기다려야만 하는 것이 못마땅할 수도 있었다. 하루를 시작하는 시점에서부터 계획이 틀어지는 것이 짜증스러울 수도 있었고, 여행 전부터 너무나 많이 들어온 '더러운 파리 지하철'의 플랫폼에서 오래도록 머무르는 것이 찝찝할 수 도 있었다. 여전히 어떤 것이 정답인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어쨌든 아내는 "지금 이 상황 때문에 베르사유에 안 가고 싶어졌어"라고 할 만큼 분이 나 있었다. 


순간 '그 정도인가?'라는 마음과 함께 물음표가 떠올랐지만 왠지 이유를 물어보지는 못했다. 그저 이해한다는 제스처를 보이는 것이 최선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이 상황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이곳까지 왔으니 참고 가보자'라는 분위기를 내기 위해 노력하며 시간을 보냈다. 시답지 않은 농담도 하고, 서로 안아주기도 하면서 아내도 서서히 마음을 내려놓았다. 다행히 아내의 분노는 오래가지 않았고, 열차도 연착은 되었지만 예고한 시간에는 맞춰서 들어왔다. 열차의 2층 좌석에 앉을 즈음에는 다시 기대하는 마음이 생기기 시작했고, 열차가 달려가면서 보여주는 센 강과 도시 외곽의 풍경을 보면서는 기분이 조금 더 부풀어 오르기도 했다. 



둘이 하는 여행이었다. 더 정확히는 '둘만' 하는 여행이었다. 한 사람의 감정은 바로 옆 사람에게 전달될 수밖에 없었고, 따로 완충 역할을 할 사람도 없었다. 한 사람이 좋으면 모두 좋은 것이 되고, 한 사람이 안 좋으면 모두 불편해지는, 둘밖에 없는 여행이었다. 둘 중 한 명이 힘들면 다른 한 명도 같이 쉬면서 회복해야 하는 여행, 한 명이 신이 나면 다른 한 명도 덩달아 신이 나는 여행. 우리는 여행 중에 이런 얘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감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되도록 '내'가 힘을 내어야 '우리'가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짜증 나는 상황을 맞닥뜨리더라도 되도록 빨리 털어내야 함께 좋은 순간을 누리는 시간이 더 많아진다는 것을. 


아내는 그렇게 애를 썼던 것 같다. 파리의 여러 상황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남편과 어렵게 시간을 내서 온 여행지에서 충분히 누리고 돌아가려면 그 상황에서도 좋은 것을 찾고, 그것에 집중하는 것이 현명하다는 사실을 이미 잘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순간순간 기분이 상하는 상황을 마주한다 해도 빨리 털어내고 정리하고 흘려버릴 수 있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한편으로는 짝꿍의 안 좋은 순간까지 여행의 일부라고 받아들일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행에서 마주하는 돌발상황이 훗날 추억 돋는 에피소드가 될 수 있듯이 함께 하는 사람의 예상치 못한 컨디션도 둘의 인생에서 귀한 가르침을 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 그것도 9년을 함께 해 왔고, 앞으로 수십 년을 더 함께 할 사람의 변화라면 중요한 포인트로 이해하고 기억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 


둘이 살아온 인생이 둘의 여행에 도움이 되고 있었고, 둘이 경험하는 여행이 앞으로의 인생에 또 도움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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