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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연못 Aug 14. 2023

한 명의 경험이 두 명의 이야기로

대학생 때 배낭여행으로 유럽을 처음 여행하면서 인상적인 곳 중 하나가 미술관이었다. 다른 어떤 대륙보다 미술관, 박물관이 주요 관광지로 자리 잡고 있는 여행지였기에 자연스럽게 많이 들르게 되었는데, 예술 작품을 보는 것이 흥미로울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게 해 준 경험이었다. 어디선가 들어보았던 유명 작품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재미도 있었고, 누군가 열과 성을 다해 완성한 작품이 주는 묘한 매력 같은 것도 느껴졌었다. 예술에 대해 무지한 자이다 보니 대단한 울림 같은 것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나름의 취향 찾기를 하며 찬찬히 구경하는 재미가 있었다. 


그 낯선 경험을 진하게 남겨준 곳 중 하나가 루브르 박물관이었다. 크고 작은 그림들과 조각상들을 보면서 '대체 이걸 어떻게 만들었지?'라는 감탄을 몇 번이나 하고 또 하게 되었던 곳. 시간을 내어 정말 찾아올만한 곳이라는 인상을 남겨준 곳이었는데, 그 루브르 박물관을 거의 20년이 지나 '아내'라는 짝꿍과 함께 가게 되었다는 사실이 뭔가 간질간질했다. 세상에, 그때 여행하면서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루브르를 다시 또 방문하게 될 것이라는 상상은 물론,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보게 될 것이라는 상상은 전혀 하지 못했었다. 사실 그 옛날에 혼자 미술관에서 작품들 구경하는 것도 좋았지만, 연인들이 손 잡고 이야기하며 미소 짓던 모습이 부럽기도 했었다. 


아내는 유럽에서 미술관을 가는 것이 처음이었다. "당신, 루브르는 가봤다고 했었지?" "응, 그래도 또 가야지. 거기는 워낙 커서 못 본 것도 많아." "그래? 그럼 루브르도 가야지!" 계획 때부터 신이 났던 아내는 미술관들을 일정에 차곡차곡 채워 넣었다. "당신, 그때 오르세 미술관은 못 가서 아쉬웠다고 했었지?" 아내는 나 대신 오래전 기억을 꺼내가며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오랑주리 미술관을 하루에 하나씩 배치해 두었다. 



파리에 도착한 다음날 첫 미술관은 오르세였다. 아내는 내가 이런 작품들을 처음 마주했을 때처럼 재미있어했다. 미술관에 들어선 순간부터 조그만 것도 놓치지 않겠다는 눈빛으로 하나하나 자세히 보고 설명도 건너뛰지 않았다. 나는 아내의 그런 모습이 재미있었다. "처음부터 너무 힘 빼지 마. 여기 엄청 넓어. 보다 보면 지칠 테니까 쉬엄쉬엄 보다가 진짜 유명하거나 관심 가는 것만 집중해서 봐." 마치 미술관 마스터라도 되는 듯 던지는 조언에도 아내는 굴하지 않고 열심이었다.  


결국 1시간 정도 지날 무렵부터는 앉을 곳도 찾고, 눈에 안 들어오는 것은 넘기기도 하고, 이곳이 아니면 볼 수 없다는 작품들 위주로 동선을 추려보기도 했다. 그렇게 보내는 시간들이 실없이 재미났다. 이름 모를 작품 앞에서 자신의 생각을 얘기하며 동의도 구하고, 둘이 같이 마음에 든 작품을 보면서 맞장구도 치고, 각자의 베스트를 고르면서 기념품 엽서로 있을지 기대하기도 하고. 그 안에 있는 수많은 관광객들과 별다를 것 없이 흐름에 휩쓸려 다니는 모양새였지만, 그 안에서도 우리만의 시간이 있었고 우리만의 감성이 있었다. 


아내는 처음 경험하는 유명 미술관에 흠뻑 취해 한참을 걷고 또 걸었다. 안타깝게도 그 덕에 다음날부터 허리가 아프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오랑주리 미술관을 안 갈 수는 없었다. 그곳에서 직접 마주한 모네의 연작은 얼마나 멋들어졌었는지. "우리 집도 이렇게 넓어서 하얗고 깔끔한 거실에 이런 그림 걸어두면 너무 멋지겠다!" 우린 평생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상상을 하하 호호 나누면서 두 번째 미술관도 마음껏 즐겼다. 소문대로 오르세에 비해 규모가 작았던 덕에 이날은 살짝 적게 걸을 수 있었다. 


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오전에 예약했던 루브르 박물관은 아쉽게도 보지 못했다. 당일 오전 갑자기 시작된 연금개혁 반대 파업으로 인해 박물관이 문을 닫았던 것이다. 잔뜩 하이라이트를 기대하는 마음으로 도착했을 때 밖에서만 맴도는 사람들과 소란스러운 소리에 이상하다 싶었는데, 모두가 갑자기 당한 휴관 사태에 당황스러운 모습이었다. 20여 년 전의 기억을 더듬으며 그날과 비교되는 오늘의 행복한 감상을 기대했던 설렘이 바람결에 날아가는 것 같았다. 그래도 괜찮았다. 둘이 또 다른 시간을 보내는 것으로 충분히 행복할 수 있었다. 루브르의 상징인 유리 피라미드 앞에서, 그리고 박물관의 멋진 외관을 배경으로 함께 사진도 찍고 웃고 떠들면서 다른 구경할 곳들을 찾아보았고, 그것은 그것대로 또 둘만의 즐거운 여행이 되었다.  


혼자 여행 왔을 때 보고 느꼈던 것들을 세월이 흘러 아내와 함께할 수 있어서 신기하면서도 참 감사했다. 한 명의 추억이 두 명의 추억으로 페이지가 넘어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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