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에서의 마지막 날, 루브르 일정이 무산된 뒤로는 마음이 동하는 대로 움직였다. 예상할 수 없었던 파업이 예상할 수 없었던 자유시간을 준 느낌? 우선은 옆에 있는 센 강을 따라 조금 걸었다. 왠지 가장 파리다운 느낌이 나는 센 강의 풍경을 보고 있자니 기분이 좋아졌다. 카페에서 커피와 빵으로 약간의 허기도 달랜 뒤 100년이 넘었다는 백화점도 구경했다. 최근 리노베이션으로 한층 더 멋스러워졌다는 풍문에 이끌렸는데, 아이쇼핑만 하고 딱히 뭔가를 사게 되지는 않았다. 대신 우린 버스를 타고 아침에 이동할 때 보았던 조그만 디저트 가게로 향했다. 사탕 같기도 하고, 누가 같기도 한 프랑스 전통 디저트를 파는 곳이었는데, 선물로 괜찮을 것 같았다. 그곳에서 몇몇 지인들의 선물을 챙기고는 다음 행선지를 정했다.
오페라 가르니에. 이번 일정에서 아쉽게 빠진 후보였는데, 이렇게 시간이 난 김에 가보기로 했다. 마침 디저트 가게에서 가깝기도 했고, 운 좋게 대기도 길지 않아서 금세 들어갈 수 있었다. 대대적인 외관 공사로 정문의 풍경은 무척 아쉬웠지만, 내부 공사 얘기는 없었으니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입장권을 구매하고 본격적으로 구경에 들어선 순간, 아내의 기분이 활짝 피었다. 고풍스러우면서도 호화로운 공간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는데, 홀린 듯 사진을 연달아 찍게 되는 곳이었다. 당연히 우리 말고도 수많은 사람들이 그 아름다운 공간을 담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아내는 사실 베르사유 궁전이 살짝 실망스러웠었다. 기대했던 것보다 낡고 허름해진 부분도 많았고, 전시된 것 중 당시의 실제 물건이 아니라 후대에 대체한 물건들도 많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그런데 오페라 가르니에는 약 150년 전에 지어진 공간이 지금까지 반짝반짝 보존되는 것은 물론 실제 공연장으로도 여전히 운영되고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21세기에 한 공연장으로 들어섰더니 시대물에서 보았던 아름다운 공간이 펼쳐지는 느낌?
사실 아내에 비해 난 그렇게까지 흥이 차오르지는 않았다. 인상적이고 멋지긴 했지만, "우와, 우와, 여기도, 여기도!" 정도의 데시벨까지 올라가지는 않았다. 그래도 아내가 좋아하니 같이 신이 나긴 했지만. 예전 홍콩 여행 때도 그랬던 것 같다. 내 느낌에는 홍콩이나 싱가포르나 비슷한 면이 많은 것 같았는데, 아내에게는 천지차이였다. 싱가포르는 세상 재미없었고, 홍콩은 세상 최고였다. 솔직히 아직도 어떤 차이 때문에 그러는지는 눈치채지 못했다. 반면 아내는 내가 흥이 나는 포인트가 잘 이해되지 않았다. 공항에서 들이닥친 불시검문 같은 것이 어떻게 여행의 묘미가 될 수 있는지, 목적지도 없는 골목길을 하염없이 따라가다가 돌아오는 길을 찾기 위해 고생하는 것이 무슨 재미가 있는지 함께 9년을 살았어도 이유를 이해하기 어려운 일일 것이다.
이런 사람 둘이서 같이 여행을 하고 있었다. 한 해뿐만 아니라 아홉 해가 되도록 수도 없이. 물론 내가 엄청 신이 났는데, 상대방이 이상하게 바라보면 김이 빠지기도 한다. 하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상대방의 신남 때문에 나도 같이 신이 나는 경우도 많다. 맹숭맹숭하게 지나갈 순간이 함께하는 사람의 기분 좋음으로 인해 즐거운 추억으로 자리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그곳을 추억하면 좋았던 기억이 되곤 한다. 그때의 내 심심함은 시간에 묻혀 사라지고, 짝꿍의 흥겨움이 그 시간을 채우고 있기 때문이다. 파리에서 좋았던 곳, 추천하고 싶은 곳을 물으면 오페라 가르니에라고 대답하게 되는 이유다. 아내의 밝은 웃음이 오페라 가르니에를 정말 좋았던 곳으로 기억하게 만드니까.
물론 함께 손뼉이 맞는 곳도 있고, 그런 곳은 더 진하게 기억에 남는다. 셋째 날 저녁 고심 끝에 찾아갔던 식당처럼. 평점이 좋긴 했지만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은, 골목 안에 있는 흔해 보이는 식당이었는데 멋진 저녁을 선물해 주었다. 아내가 프랑스에서 꼭 먹고 싶었던 어니언 수프도 만족스러웠고, 음식도, 커피도 모두 기대 이상이었다. 으리으리한 레스토랑은 아니었지만, 파리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보내기에 더할 나위 없었던 곳으로 손꼽으며 둘이 즐겁게 돌아왔던 기억이 난다.
서로 다른 포인트에서 좋아하게 되건, 같은 포인트에서 좋아하게 되건, 결국 좋은 여행으로 기억에 남는다는 것이 좋았다. 둘 다 싫었던 것만 아니라면 어떤 부분이든 좋은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것이었으니까. 우리 둘의 10년 차 여행이 좋은 것들로 더 많이 채워져서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