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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연못 Aug 14. 2023

여정의 중반, 새로운 여행의 시작

신혼 때 우리는 참 많이 싸웠었다. 둘 다 평생 싸울 분량을 이 시기에 다 쏟아붓기로 작정이라도 했던 것처럼. 서로가 너무 달랐고, 기대했던 것들과 너무 다른 결혼 생활이었다. 이해하기 힘들었고,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다행히 싸움은 2~3년이 지나면서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 신혼부부를 위한 교회의 한 모임에서 서로를 이해하는데 필요한 힌트를 얻었고, 힌트를 바탕으로 서로가 본디 다른 사람임을 인정한 채 이야기를 풀어나갔다. 이해되는 것이 생겼고, 당장 이해되지 않는 것은 훗날을 기약하며 '원래 그냥 그런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생겼다. 싸움이 줄어드니 함께 지내는 것이 행복했다. 싸우던 시간을 다른 일상적인 시간들로 채울 수 있어서 좋았다. 이제야 둘만의 가정을 꾸려가는 느낌이었다. 


비교 대상이 조금 과한 감이 없진 않지만, 파리에서 바르셀로나로 넘어갔을 때가 무려 이런 느낌이었다. 새로운 여행이 시작된다는 안도감. 큰 투닥거림은 없었지만 불안과 긴장을 한편에 내재한 채 다소 조심스럽게 다녀야 했던 파리에서의 일정을 끝내고, 이제야 진정한 10년 차 기념여행이 시작되었다는 기대감. 낯설고 힘들었던 유럽과의 시차도 이제 다 받아들였고, 빛이 덜 들어와서 답답했던 1층 신혼집에 홀가분한 작별을 고하듯 춥고 우중충했던 파리에 시원섭섭한 인사도 건넬 수 있었다. 비로소 위험요소들은 모두 제거되었고,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을 그저 즐기는 마음만으로 채울 수 있게 되었다. 다행이었다. 새로운 챕터가 시작되었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파리에 도착했을 때와 비슷한 저녁 시간이었다. 시내까지 이동은 공항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대중교통이 불안해 택시를 탔던 파리와는 달랐다. 공항버스 티켓을 판매하는 기계를 이용할 때 신용카드가 왜 안 되는 것인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짜증도 나지 않았다. 오히려 학생 2명이 도와주어서 따뜻한 정을 느끼는 계기가 될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보이는 바르셀로나의 저녁거리는 그렇게 정겨울 수가 없었다. 쓰레기 더미도, 파업도 없었다. 그저 별 탈 없이 안전하게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이 가득했다. 어느새 어둑해진 밤거리에 버스에서 내려 2~3블록을 호텔까지 걸어가야 했지만 하나도 불안하지 않았다. 오히려 설렘이 일렁일 정도였다. 우리가 지낼 호텔은 카사바트요라는 유명 관광지 근처였고, 늦은 시간까지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여행 기운이 만연했다. 


아내는 안정감이 참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안정감을 헤치는 불안 요소의 범위가 언제나 넓고 다양했다. 여전히 그 깊고 오묘한 세계를 다 헤아리지 못해 종종 부딪히며 핀잔을 듣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아내가 안정을 누릴 수 있는 영역에 머무르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었다. 평안한 상태에 거할 수 있어야 비로소 즐길 수 있는 것일 테니까. 


마음이 편안해지는 도시에 도착했다는 안정감, 그리고 방금 짐을 푼 호텔까지 여러모로 마음에 든다는 만족감 등으로 인해 우리는 한껏 들떠 있었다. 늦어진 시간에 어딜 가기는 애매했지만, 우리 방에서 누릴 수 있는 작은 호사를 활용해 이 여운을 만끽하기로 했다. 근처 편의점을 다녀오는 것으로 외출 욕구를 살짝 달랜 뒤 발코니에서 뜨끈한 사발면 등으로 조촐하지만 풍족한 만찬을 즐겼다. 바르셀로나 특유의 주거 형태 덕에 발코니에서는 조용하고 넓직한 공터 같은 곳을 마주할 수 있었고, 시원한 밤공기와 더불어 별빛이 반짝이는 맑은 하늘을 바라보며 라면 국물을 마시는 순간이 기가 막히게 완벽했다. 많이 신이 난 우리는 평소 찍어본 적도 없는 동영상 촬영을 하면서 마치 유튜브 라이브라도 하듯이 재잘재잘 떠들고 있었다. 


행복해졌다. 여행을 떠나기 전 막연히 꿈꾸었던, 소소하지만 충분한 설렘의 순간이 실현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겨우 두 번째인, 9년 전 첫 번째 때에도 3~4일밖에 머무르지 않았던 이 도시에 희한하게 정이 갔다. 화려하고 예뻤지만 불안하고 불편하게 느껴졌던 파리 바로 다음이어서 이득을 본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거나 바르셀로나는 파리에 비하면 소박한 아름다움이었지만 편안하고 즐겁게 느껴졌다. 밝은 햇살 때문인지, 해변가의 느긋함 때문인지 잘 모르겠지만 이상하게 정겨웠다. 


기분 좋게 잠들 수 있었다. 나라를 이동하느라 피곤한 탓도 있었겠지만, 도시가 주는 편안함 덕에 깊은 잠과 휴식을 취할 수 있었다. 어느 때보다 다음날의 여행이 기다려지는 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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