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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채원 Sep 09. 2019

KBS 다큐멘터리 <88/18>을 보고

<88/18>은 충격, 그 자체다. 이로서 서울올림픽 30주년 기념을 표방하는 이 KBS의 다큐멘터리는 공중파 다큐멘터리에 일종의 분기점을 만들어낸 셈이다. 동시에 충격과 함께 쾌감도 선사한다. 공중파에는 카톨릭 전례와 같은 규정된 미학적 장치들이 있고, 예수회 수사와 같이 이를 맹목적으로 옹호하는 일군의 '꼰대'들이 존재함은 암암리의 사실이다. 시청자들에게 친절해야 하고, 내레이션으로 쉽게 풀어 설명해야 하고, 자막을 넣어서 아이를 재운 엄마들이 영상만 보고서도 맥락을 알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나는 이런 말들이 레귤러 프로그램에서는 진실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규정들이 다큐멘터리에도 부합하느냐, 나는 '약간' 반대다. '약간'이라는 조건을 내거는 이유는 'TV 다큐멘터리'는 TV라는 부여된 한계 내에서 시도 가능한 모든 미학적 실험과 전위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에는 일부 동의하지만, 그 이전에 연출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분명히 드러낼 수 있는 훈련이 필요해서일 것이다. 영상이나 음향에서의 실험이 빛을 발한다 하더라도 시청을 지속시킬 수 있는 맥락을 창출하지 못한다면 실패한 다큐멘터리라는 말이다. 


나는 TV 프로그램이 취할 수 있는 새로움이란 레귤러 프로그램이 갖고 있는 철저한 현장성과 다큐멘터리가 추구할 수 있는 예술가적 자의식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다고 본다. 시청률 4%가 말해주듯이, <88/18>은 친절한 다큐멘터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영상과 음향 그리고 음악이 각개약진해 기존의 미학적 장치들을 파괴하는 쾌감이 있었다. 아마도 시청자들이 아니라, 영상물을 제작해 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법한 그런 쾌감. 이렇게 무자비하게 드라이브를 거는 연출자의 배짱도 부럽거니와, 그 배짱을 받쳐주는 조직의 힘도 부럽다. 그렇다면 이런 시도들이 MBC에서는 영영 불가능한 일일까?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연출자 이태웅 PD는 인터뷰 말미에서 이런 말을 했다. "다큐에 대해 전범을 갖고 있고 조언을 할 수 있는 제작부서가 아니라, 그런 편견을 갖지 않는 스포츠 국에서 제작된 다큐여서 가능했다." 나는 이 말이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고 본다. 공중파적인 전범을 깨려는 시도들은 그 이전부터 계속 있어왔고, 여전히 진행 중이다. 내레이션이 없는 다큐멘터리가 <88/18>이 처음은 아니며, 자료들을 체계적으로 그러모아 유려한 편집으로 엮어낸 시도들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또 <88/18>은 어찌 보면 (서구의 다큐멘터리안들이 제시하는) 다큐멘터리의 본령에 충실한 다큐멘터리이기도 하다. 내가 볼 때, <88/18>의 강점은 단 한 마디로 요약하고 싶다. '베이퍼웨이브Vaporwave'의 다큐멘터리화.' 즉, 선도적인 힙스터들의 서브컬처를 과감히 오버그라운드로 끌어올렸다는 점. 2000년대부터 서구에서 베이퍼웨이브가 유행임을 아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런 감성들을 감히 다큐멘터리에 적용시킬 수 있었던 사람은 이태웅 PD가 처음이었다. 누가 김기조를, 누가 DJ 소울스케이프를 공중파에서 보리라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이런 강점을 더욱 강조하려 할 때, 내게 보이는 역량이란 조직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원 배분의 효율성 문제였다. 이 다큐멘터리는 과감히 야외촬영은 줄이되, 촬영분에는 무엇보다도 힘을 주었고 그로 인해 절약된 시간과 예산을 이미 KBS에 축적되어 있던 자산에 쏟아부었다. 신생 종편들이 범접할 수 없는 영역인 공중파에 방대하게 축적되어 있는 영상 자료의 적극적인 활용. 강점은 키우되, 약점은 줄이려는 간단한 방법이 결국 마법을 부렸고, 그 결과물이 <88/18>이 되었다. 다시 앞서의 질문으로 돌아와서 MBC에서는 불가능한 일일까? '아마 MBC에서는 이래서 어려울 거야, 아니 저래서 안 될 거야' 이런 말들이 젊은 PD들 사이에서 터져 나오고 있지만, 나는 그런 말에 별로 동의를 표하고 싶지 않다. 개인의 의지는 부합하지 않는데, 상황과 환경의 제약으로 돌리려는 시도들은 패배주의의 소산으로 비칠 뿐이다. 그러나 이런 패배주의, 비관주의는 또 조직의 객관적 한계에 대한 일정 정도의 진실을 내포하고 있기는 하다. 먼저 조직에 위기 의식이 팽배한 가운데, 인적 청산의 미비함으로 전반적인 노동 의욕의 저하가 스페인 독감처럼 조직을 병들게 하고 있다. 게다가 MBC와 같이 똑똑한 사람들이 많은 조직, 입을 열기 좋아하되, 입을 닫고 지켜볼 용기는 별로 없는 사람들이 엉겨 있는 조직에서 주의주의에 대한 또한 강박적인 강조는 그 구성원들에게 또 얼마만큼의 알리바이가 될 수 있겠는가. (열심히 간섭해줌으로써 모든 실패를 윗선의 간섭 탓으로 돌리려는 무능력에 대한 불감청 고소원의 알리바이) 무기력에 빠져 환경을 저주하는 구성원들과 의지를 발휘할 것을 강조함으로써 이들에게 알리바이를 제공하고 있는 일부 관리자들의 적대적 공생관계의 틀. 이 끈끈함이 MBC의 뇌관에 끊임없이 찬물을 끼얹는 역할을 하고 있지는 않은가, 이래저래 말들은 많지만 양상은 훨씬 복잡한 데 있는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이런 다큐가 MBC에서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가능하지 않게 하는 조건들은 또 무엇일까, 하는 질문에는 답을 못하겠다. 

(2018/9/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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