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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채원 Sep 09. 2019

엄마가 사랑한다 하더라도 - SBS 그알에 대하여

<그것이 알고 싶다>가 화제다. 특유의 세련된 화면 구성과 각종 팩트와 데이터를 시각화하는 능력은 독보적이라고 본다. 하지만 프로그램을 보면서 화려하고 긴박감 있는 구성에도 불구하고 자꾸 시청 중에 흥미가 떨어짐을 느꼈다. 왜 그럴까, 원인을 곱씹어보면 아무래도 이 프로그램을 왜 계속 봐야 하는가를 잘 모르겠다는 이유가 가장 크다. 보통 탐사보도 프로그램을 보는 이유는 '공익'이라는 문제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시민으로서 지켜야 할 공공의 이익이 있고, 이러한 공공의 이익을 사유화하려는 각양각색의 욕망들이 있다. 이 욕망들의 투기장 속에서 우리는 우리가 지켜야 할 가치가 무엇인가를 고민하게 한다. 하지만 이 프로그램에는 공익도 없고, 고민도 없다.


지금은 언론노조 위원장으로 가 있는 선배가 팀장으로 있을 때 그랬다. "너희 엄마가 널 사랑한다고 하면 뭐라고 할 거야?", "저도 사랑합니다, 그래야겠죠.", "아니지, 엄마 날 사랑한단 증거 있어요?, 그래야지.", "If your mother says she loves you, check it out." 유명한 저널리즘의 모토란다. 그렇다. 언론인에게는 합리적인 의심이 필요하다. 그러나 그 의심을 뒷받침할 수 있는 근거가 필요하다. 이 프로그램에 그런 근거가 얼마나 있을까? 이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난 뒤, 정말로 이것이 끝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당연히 후속 취재가 뒤따라야 하지 않을까? 다각적인 취재를 통해 정당한 근거를 제시하기보다는 충돌되는 이미지의 병치를 통해 논리의 비약을 꾀한다는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예컨대 백번 양보해서 정치인과 조폭 간의 유착 관계가 드러났다고 치자. 여기에 정치인으로 해서는 안 될 불법적 행위가 어떤 것인가, 시민 대다수의 안전이 위협당할 만한 일이 있었는가, 시정에 구체적으로 어떤 불이익이 있었는가. 나는 진정 '그것이 알고 싶다.'


정치인은 조폭의 구성원들과 사진을 찍었다. 이것이 유착 관계를 설명하는 근거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피디는 한 술 더 떠 조폭 구성원들과 한 화면에 나와 얘기를 나누지 않았던가? 그러면 그 정치인보다 더한 유착 관계라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사진 자료는 그 동안의 취재를 확정짓기 위해 사용되는 요소임에도 불구하고, 이 프로그램에서는 마치 유착관계를 설명하는 근거처럼 사용되었다. 조폭이 설립한 합법적 기업에 불명확한 기준의 공적 자금 지원이 있었고, 이 기업은 시의 표창도 받았다. 이게 시장과 조폭 기업의 유착 관계를 규명하는 데 얼마나 충분한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자본주의 사회, 그리고 특수한 인적 관계망이 그물처럼 엮여 있는 한국 사회에서 선거 캠페인에 참여한 사람들에게 당선 이후에 논공행상이 이뤄지는 방식은 후진적인 폐습임에도 오랜동안 한국 정치를 구성하는 동력으로 자리잡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해당 시장이 마치 조폭과 유착 관계를 통해 시정을 말아먹었다는 근거가 될 수 있을까? 정말 유착관계가 있는 개별 공무원의 일탈일 수도 있고, 부실한 선정 기준을 악용한 조폭 기업의 야료일 수도 있다. 당연히 취재진으로서 확인해야 할 일들이 많이 남아 있다. 물론 이재명, 은수미와 같은 전, 현직 성남시장이 떳떳한 정치인이라고 옹호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그들이 떳떳한 정치인이라는 근거 또한 아직은 알 수 없는 일이니까. 그들의 정치적, 인격적 결함은 나도 여러 경로를 통해 확인한 바다. 하지만 그것이 무시무시한 살인사건을 저지른 조폭의 사업 파트너라는 근거로서 충분한가.


타사의 프로그램에 대해 왈가왈부하면 쓸데 없는 오해를 살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마디를 굳이 덧붙이는 이유는 같은 우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다. 게다가 이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이미 장정일 씨가 뛰어난 글('부실한 보도에도 공적 가치가 있다?')을 남긴 적이 있다. 여기에 무엇을 보탤 수 있을까? 장정일 씨는 글의 서두를 조셉 콘래드의 <암흑의 핵심>에 나오는 커츠의 마지막 독백으로 열고 있다. '무섭다, 무섭다.' 사건 자체도 무섭지만 이런 식의 취재를 감행할 수 있는 언론의 무책임은 더욱 무섭다. 나는 장정일 씨의 인용이 의도적이라고 본다. <암흑의 핵심>에 나오는 인상깊은 구절, 포도 위를 걷는 신사와 숙녀들이 콩고의 야만을 어찌 알겠는가, 바꾸어 말하면 뭔가 센세이셔널한 폭로를 하고 싶은 언론인의 마음 속에는 얼마나 무서운 것이 자라고 있는가. 그리고 선의를 가지고 방송을 대하는 시청자들이 그 무서운 것을 어찌 알겠는가! 탐사보도 프로그램을 하다 보면 각종 확인되지 못한 제보들이 쏟아진다. 어마어마한 내용을 담고 있으며 전파를 타면 엄청난 반향이 약속되어 있다. 하지만 정말 방송이 될 때는 이 모든 것이 걸러지고 또 걸러진다. 왜? 근거가 불충분하기 때문이다. 탐사보도를 제작할 때는 이 유혹을 잘 이겨내야 한다. 나는 <그것이 알고 싶다>가 그러한 유혹을 잘 이겨냈다고 보지 않고 있다. 그래서 무섭다. 나 또한 그러한 유혹에 굴복하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는가.

(2018/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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