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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채원 Apr 01. 2020

나보코프 문학 강의

통근길 독서일기 6. 

그동안 많은 책을 읽었지만 무조건 독서일기를 쓰겠다는 다짐은 바쁜 일과 속에서 스러지고 브런치는 어느새 폐허 상태가 되었다. 쉼보르스카의 <읽거나 말거나>을 읽은 이후, 할 말이 있든 없든 무조건 써보자는 다짐이 이렇게 짧게 지속될 줄은 몰랐다. 읽기는 쉽지만 읽은 바에 대해 뭘 써야 한다는 부담감은 여전히 이기기 힘들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문학 강의가 책으로 나왔고 심지어 매우 좋은 책이라는 트윗들이 눈에 밟힌 김에 다시 독서일기를 써보기로 했다. 


독서를 마친 간단한 감상을 적자면, 나 또한 <롤리타>가 그 소아성애적 주제에도 불구하고 탁월한 소설임은 부정하지 않는다. 영어권 최고의 소설이라는 평가에도 매우 동의하는 편이다. 다만 나보코프의 회고록인 <말하라, 기억이여>는 신변잡기와 반공주의의 혼합이었으며 이 <나보코프 문학 강의>에 드러난 그의 예술론이나 문학론은 용렬하기 그지없다고 평가하고 싶다. 이 책은 몇몇 논자들의 호평과는 달리 새겨둘 만한 몇 개의 문장 외에는 지엽말단의 극한과 같은 책이다. 


나보코프의 사촌인 니콜라스 나보코프가 CIA의 자금과 지원으로 서구 지식인들을 규합한 '문화자유회의 CCF'의 사무총장이었으며, 다시 CCF에서 나온 자금이 신비평과 포스트모더니즘 비평의 토대가 되었음은 프랜시스 스토너 손더스의 <문화적 냉전>에서 잘 지적된 바 있다. 나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문학론 또한 이와 연장 선상에 있다고 생각한다. 문학에서 역사와 사회적 맥락의 체계적인 제거를 통해서 독자들로 하여금 오로지 텍스트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기울이게 한다는 전략 말이다. 


나보코프는 이 책에서 '예술은 아름다움과 연민의 결합'이라고 역설하고 있다. 일견 아름답고도 일리 있는 얘기다. 나도 어릴 적,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를 읽고 얼마나 많은 눈물을 흘렸던가. 하지만 되돌아 예술에서 오로지 아름다움(미)와 연민(감성)의 영역만이 존재하는지 반문해 보면, 이런 전제는 일견 아름다운 문장으로만 존재할 뿐이다. 이런 시각은 예술에 대해 조야한 이해를 갖고 있거나, 아니면 의도적으로 (몰락한 러시아 망명 귀족이라는 태생적 한계로 말미암아) 무시해 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예술에서 연민은 작품을 사랑하는 첫걸음이 된다. 신에게 대적하는 그리스 고전의 영웅뿐만 아니라 현대 피카레스크 소설의 반영웅의 좌절 속에서도 우리는 연민을 느낀다. 그러나 이 연민을 일으키는 메커니즘은 무엇인가에 대한 언급은 없다. 왜냐하면 그가 집요하게 파고드는 개인의 대쌍은 오로지 그림자 만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의도인가, 아니면 무능력인가. 여기에는 고전주의에서 말하는 '이성'도 리얼리즘에서 말하는 '역사'도 없다. 이 모든 것을 다 소거해 버리고 나면 그의 문학론에서 남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텍스트에 대한 숭배, 세부에 대한 끝없는 집착. 그리고 거친 독해의 항해를 수행하는 자아에 대한 페티시즘뿐. 되풀이해서 읽고 자세히 읽는 것은 좋다. 그러나 이를 집약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이 강의를 통해 어느 정도나 해소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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