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근길 독서일기 7.
일찍이 <TIME>지의 발행인 헨리 루스는 20세기를 일컬어 '미국의 세기'라고 했다. 이 미국의 세기를 여는 데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의 망명 지식인들이 어떤 역할을 했는지 추적한 책이 바로 <바이마르의 세기>다. 그들은 미국의 세기를 여는 데 헌신을 아끼지 않았고 나치가 할퀴고 지나간 독일 연방 공화국 (속칭 서독)에서 바이마르의 세기를 다시 열었다.
프랜시스 스토너 손더스의 <문화적 냉전>이 실제 냉전을 수행한 행위자에 집중했다면, 이 책은 그 설계자들을 소개하고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짧았던 11월 혁명과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경력을 시작했거나 활동하다, 나치의 탄압을 피해 미국으로 망명한 학자들이다. 조지 케넌, 맥조지 번디 같은 냉전 전사들의 막후에서 도움을 주는 멘토로, 한나 아렌트에게 영향을 미친 '전체주의 이론'의 창시자로, 문화계의 냉전 전사들이 벌인 성전의 토대가 되었던 '전투적 자유주의'의 고안자로 활약했으며, 록펠러 재단과 같은 CIA의 대리인들을 후원에 힘입어 냉전기 미국에서 지적,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던 지식인들이다.
이들은 모두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부터 이력을 쌓아왔으며 냉전기에는 미국에서 활약한 사람들이라는 데 공통점이 있다. 그리고 서독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분단국가를 설계하고 유지할 수 있는 법적, 이론적 토대를 닦았다. 이러한 지식인들의 활동을 추동한 요인은 바로 '바이마르 콤플렉스' 혹은 '바이마르 신드롬'이라고 불리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에 얽힌 사건들이 냉전기에 재생될지도 모른다는 강박과 공포였다. 대부분 유태계 지식인들로서, 그리고 바이마르 공화국 내에서 사민당 우파나 중앙당 지지자로서 바이마르 공화국과 제3제국의 연속성보다는 단절에 주목하면서, 그 대신 나치와 볼셰비키라는 오랜 두 숙적은 '전체주의'라는 편리한 개념으로 범주화시켜버린다. 이들의 역사 이해에 따르면 바이마르 공화국이 몰락에 이르게 된 이유는 민주주의가 내포한 허약성 때문이다. 민주주의란 민주주의를 잘 이해하고 있는 엘리트들의 지도를 받아야 하지만, 항상 대중은 선동에 취약하며 볼셰비키나 나치와 같은 전체주의자들의 유혹에 쉽사리 굴복하고 만다는 것이다.
따라서 바이마르 공화국의 몰락과도 같이, 미국이 소련과 같은 공산주의 블록의 압력에 굴복하지 않으려면 국가의 강력한 주도 하에 '대중을 위해 민주주의를 운영할 수 있는 폭넓은 지식과 기술, 그리고 전망을 갖춘 민주주의 엘리트'(p52)를 양성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런 민주주의 엘리트들이 국제적으로 연대해 '민주주의 인터내셔널'을 이뤄서 공산주의자들과 파시스트들의 쇄도를 방어하는 것이 이들의 최종적인 목표였다. 그리고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고 시민들이 자유를 적극적으로 영위하게 하기 위해서라면 선제적으로 시민들의 권리를 제한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이러한 사고는 2차 대전 당시 재미 일본인들의 격리 수용, 쿠바를 비롯한 라틴 아메리카에서 미국이 반미주의자들을 감시, 투옥했던 사례들에서 생생하게 드러난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단속적인 흥미는 있으되, 오래 두고 읽을 만한 책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정 시기에 매우 특수한 사료들을 다루고 있기 때문에 이 책을 토대로 냉전 시대의 역사라든가 당시의 지성사적 맥락을 추적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잘 읽힐 책은 아니다. 대중 교양서로는 별로 추천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정치계의 주류에서 반복해서 언급되는 '민주주의'의 윤곽을 그려볼 수 있도록 도와준다는 점에서는 가치가 있다. 오로지 '전체주의' 혹은 '독재'의 대쌍으로서 드러나는 민주주의,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과도한 민주주의는 제한받을 필요가 있다는 다소 역설적인 민주주의의 모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