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라이 체르니셰프스키 <현실의 대한 예술의 미학적 관계>
아름다움, 즉 미란 무엇이며 우리는 미를 어떻게 인식하는가? 미는 생득적 관념인가, 아니면 학습의 산물인가? 얼마 전 데이비드 호크니의 전시회가 열렸다. 인스타그램에서는 호크니의 작품을 보기 위해 줄은 선 모습들이 올라왔고,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는 호크니의 작품을 보고 나서 감개무량해하는 코멘트들이 많이 올라왔다. 왜 뜬금없이 데이비드 호크니인가? 몇 달 전 퐁피두 센터에서 호크니 회고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에, 나는 이 전시회가 호크니 예술에 대한 한국인의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해 오랜 기다림 끝에 열린 전시회라기보다 는 전 지구적 유통 현상의 일부로서 이루어진 것이라 생각했다.
미는 자연스러운 것인가? 우리는 잘 생기고 예쁜 이성을 볼 때 쉽게 아름다움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인지 우리는 마치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존재하고 그 아름다움이 대상에서 얼마나 발현되는가로 아름다운 것과 아름답지 않은 것을 판가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예컨대 전통적인 미인상처럼 "눈썹은 반달 같아야 하고 코는 마늘쪽 같아야 하고...." 이런 논리가 얼마나 현실에 부합할 수 있을까? 우리는 때로는 코가 커서 이목구비의 균형을 깨고 돌출할 때도, 나이가 들어 주름진 얼굴에서도 아름다움을 느낀다. 이럴 때 느끼는 아름다움은 가짜 아름다움일까? 체르니셰프스키의 주장은 이와 반대다. 우리는 완벽하고 이상적인 미의 형상을 알 수는 없으며 (따라서 미의 조건도 있을 수 없으며), 이미 존재하고 있는 현실이 아름답고 현실 그 자체에서 아름다움이 발현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유명한 명제를 도출해낸다.
"미는 생활이다" - p32
체르니셰프스키는 헤르첸, 벨린스키, 포이어바흐의 영향을 받아 칸트, 헤겔의 관념론적 미학과 대결하기 위해 이 논문을 완성했다. 오늘날, 유물론적 미학이란 마치 검열로 얼룩진 즈다노프 주의(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모태 혹은 시대에 뒤떨어진 학문 정도로 생각되는 것 같다. 체르니셰프스키는 이 논문에서 '미'에 대해 논구 한 헤겔의 명제들을 풍부한 예화를 들어 조목조목 반박하고 있다. 헤겔에 따르면 미가 현실에서 존재하지 않지만 인간에게는 미에 대한 거스를 수 없는 지향이 있기 때문에 그에 부합하는 대상이나 형상을 창조할 수밖에 없다. 이런 활동이 곧 '예술'이다.
인간에게는 미에 대한 불가항력의 지향이 있는데, 진실로 아름다운 것은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인간은 그의 요구에 부합하는 대상이나 현상, 즉 진실로 아름다운 대상이나 현상을 만들어내지 않을 수 없다 (헤겔) - p124
개별 대상 속에서 실현된 이념은 결코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와 같은 대상관이 곧 가상이다. 그러나 어느 정도까지는 특정 이념 속에서 일반 이념은 실현되고 특정 이념은 어느 정도까지는 개별 대상 속에서 실현되기 때문에 이 가상 속에는 진리가 숨겨져 있다. 이 진리 속에 숨어 있으면서 개별 존재에서 이념이 발현된 가상이 미이다...(중략).... 현재 지배적인 미학 체계의 미 개념은 이렇게 전개되고 있다. 이 기본적인 견해에서 다른 정의들이 파생되고 있다. 미는 제한된 발현 형식에서의 이념이다. 개념의 감각적 대상 속에서 감각적으로 발현되지 않는 것이 이념에는 전무하며, 이념의 순수한 표출이 아닌 것이 개별적 감각 대상에는 전무하므로, 미는 이념의 순수한 표출인 개별적 감각 대상이다. 이러한 관계 속에 있는 개별 대상을 형상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미는 이념과 형상의 완전한 일치이며 완전한 동일이다. - p28
존재가 아름답다는 것은, 그 존재 속에 그 이념이 완전하게 표명된 것을 말한다,를 쉽게 풀어쓰면 아름다운 것은 자신의 종에서 최상의 것, 즉 자신의 종에서 더 이상 훌륭하게 자신을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라는 의미다....(중략)... 헤겔의 정의는 단지 미에 도달이 가능한 대상과 현상의 부류 중에서 최상의 대상과 현상만이 아름답게 여겨진다는 사실만을 말하고 있을 뿐이다. 바로 그러한 대상과 현상의 부류들이 어떤 근거로 아름답고 어떤 근거로 아름답지 않은지 이유는 밝히고 있지 않다
- p29
헤겔 미학에 따르면, 특정한 대상이 자체의 탁월함으로 말미암아 미의 이상에 도달했을 때, 그래서 이념이 일치할 때를 미라 일컫는다. 체르니셰프스키는 미란 이런 것이라는 정의는 있으되, 미를 충족시키는 구체적인 조건이 무엇인지는 밝혀져 있지 않다고 비판한다. 내 생각에는 이런 식의 미의 개념은 전통적인 신학에서 신성의 위치에 미를 대입한 것에 불과한 것 같다. '존재의 대연쇄'에서 신성이 가장 충만한 신적인 것들이 있고 이것이 유출되고 유출되어 신성이 제대로 미치지 못하는 저열한 대상이 있듯이 말이다. 이런 방식의 이해는 간명할 수 있으되, 도식적인 이해에 불과하다. 또한 헤겔 미학에서는 예술의 세 가지 범주로 미와 더불어 그 초과와 미달의 정도에 따라 숭고와 골계로 나눈다. 예컨대 이념이 형상을 초과하여 압도적인 광경을 창출할 때는 이를 '숭고 sublime'라고 한다. 반면 형상 속에서 이념이 왜소하게 드러날 때는 '골계 comic'라고 한다. 책에서 나온 바와 같이 나이아가라나 로마제국의 흥망과 같은 인간의 시야를 압도하는 광경들, 일개인의 사고로 파악하기 힘들 것 같은 장경들에서 우리는 숭고를 느낀다. 숭고는 미의 초과다. 반대로 유명한 동화 '벌거벗은 임금님'이야말로 골계의 가장 좋은 예다. 벌거벗은 중년 남성의 추한 육체 위에 왕의 통치권이라는 신성한 이념이 드리워질 때, 우리는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된다. 이것이 골계다. 또한 왕의 성기가 작으면 작을수록 그와 반비례하여 골계는 커질 것이다. 따라서 골계는 미의 (부족이 아닌) 미달이다.
헤겔의 체계에 의하면 이념과 형상의 순수한 일치가 미이다. 그러나 형상과 이념 사이에는 항상 평형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어서 이념이 형상 위에 존재할 때도 있으며, 자신의 보편성과 무한성 속에서 우리에게 현상하여 절대 이념과 무한 이념의 영역 속으로 우리를 전치시킬 때도 있다. 이것을 숭고라고 부르며, 현상이 이념을 억압하고 왜곡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을 골계라고 부른다. - p38
현재 지배적인 골계의 정의 - 골계는 이념에 대한 형상의 우월이다. 달리 말하면, 골계는 내용과 실재적 의미를 요구하는 외면성 내에 은폐되어 있는 내면상의 공허함과 사소함이다. - p61
나이아가라 폭포가 폭포를 만든 절벽을 파괴하면서 자력의 중압에 못 이겨 스스로 소멸하는 현상,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가 자력의 과잉으로 인해 사망하는 현상, 로마가 자체의 중량에 못 이겨 멸망한 현상은 숭고한 현상이다. 그러나 나이아가라 폭포, 로마 제국, 알렉산더 마케도니아라는 대상이 본래부터 숭고의 영역에 속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삶이 그러해서 죽음이 그러한 것이며, 활동이 그러해서 멸망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p40
<형상에 대한 이념의 우월>로 인해 숭고의 효과는 강해지는데, 그것은 마치 여타의 많은 상황, 예컨대 숭고한 형상의 소외에 의해 숭고의 효과가 강해지는 것과 매일반이다. (피라미드는 다른 거대한 축조물 사이에 끼어있는 것보다 허허벌판에 우뚝 서 있을 때 더욱 장엄하며....) - p40
숭고한 것은 우리가 비교 대상으로 삼는 모든 것보다 훨씬 훌륭한 것이다. 따라서 숭고한 대상은 우리가 비교 대상으로 삼는 현상보다 훨씬 강한 현상이다. -p44
숭고성이 주변 대상에 대한 우월성의 결과라는 점은 이미 칸트 및 그를 이은 최근의 미학자 (헤겔, 피셔)에 의해 언급된 바 있다....(중략)..... 관점이 변화하면 미와 마찬가지로 숭고 또한 과거에 비해 보다 독자적이면서도 인간에 가까운 형상으로 보일 것이다. 동시에 숭고의 본질에 대한 우리의 견해는 숭고의 실제적 사실성, 특히 숭고한 대상과 현상의 한계, 그리고 그 힘을 무한에까지 넓히는 인간의 상상의 방해를 받아 숭고하게 여겨지는 현실에서의 숭고를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숭고한 것이 본질적으로 무한한 것이라면, 우리의 감성과 이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세계에서는 숭고한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 46
우리가 숭고함을 느낄 때, 외재하는 숭고의 형상이 형상의 캔버스를 찢고 나와 우리를 덮치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숭고는 정확하게 말하면 말문이 막힐 법한 상황. 눈 앞에서 보이는 광경을 적절하게 언어화할 방도를 찾을 수 없을 때 느끼는 일시적인 혼란일 뿐이다. 나이아가라 폭포와 같은 자연현상과 제국의 흥망과 같은 역사적인 현상을 동일한 범주에 묶어두는 것도 적절하지 못하다. 우리가 후자와 같은 역사적인 실례를 시공간에서 벗어난 진공에서 생각할 수 없다. 역사란 수많은 사건의 연쇄들이며, 그 연쇄들의 적절성으로 말미암아 의미를 획득하기 때문이다.
초상화는 화가가 그리고자 하는 인물을 완전하게 그릴 때에만 훌륭한 작품이 될 것이다. 그러나 <얼굴을 아름답게 그리는 것>과 <아름다운 얼굴을 그리는 것>은 완전히 별개의 사실이다. 예술 작품의 질에 관해 말하는 것은 예술의 본질을 규정할 때 비로소 가능해진다. 미를 이념과 형상의 일치로 파악한 정의는 아름답고 살아 있는 자연이 아닌 아름다운 예술 작품을 고려하고 있으며, 이 정의는 살아있는 현실미보다 예술미에 편중하는 미학에서 비롯된 경향의 산물이다. - p31
라파엘로의 그림들이 그뢰즈 작품의 좋지 않은 점을 발견하도록 강요하지 않는다. 셰익스피어가 있는데도, 우리는 이류 작품, 심지어 삼류 작품까지도 즐거운 마음으로 재독 하곤 한다. 미적 감각이 추구하는 것은 좋은 것이지 허구적으로 완전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현실적인 미 속에 많은 중요한 결점들이 있더라도 그것을 만끽하는 데 아무런 지장이 없다. - p73
인간은 훌륭한 것만을 구하지, 완전한 것을 구하지 않는다. 완전함을 요구하는 것은 순수 수학뿐이다. - p81
앞서 말했듯이, 미는 생활이다. 현실 속에서 아름다움이 나오며, 또한 아름다운 것은 곧 현실이다. 그리고 이러한 현실을 재현, 판단, 평가해서 특정 양식으로 공유하는 것이 곧 '예술'이다.
눈이란 결국 대상의 껍데기, 윤곽, 외형만을 볼 뿐이지, 그 대상의 내면의 구성을 보지는 않는다. 여기에서 미는 <대상 그 자체가 아니라 대상의 표면이다>라는 결론이 나온다. - p83
현실에서 우리는 절대적인 것을 접하지 않는다. 따라서 어떤 인상이 우리 내부에서 절대 미를 불러일으키는지는 경험으로 말할 수 없다. - p85
인간의 자연적인 성향은 일의 어려움과 사물의 희소성에 매우 높은 가치를 둔다는 것이다..... 왜 그런가? 첫째로 이것은 드문 일이며 둘째로 이것은 많은 시간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 p116
우리가 가치를 두는 것은 단지 인간의 힘이며 인간의 가치일 뿐이다. 그리고 우리가 예술 작품을 편애하는 근거가 여기에 있다. 예술 작품은 인간의 작품이다. 따라서 예술 작품에는 그 어떤 점에 있어서 우리에게 낯설지 않은 것이 존재한다고 보고 그 예술작품을 자랑한다. 예술 작품은 인간의 이성을, 인간의 힘을 증명하며, 따라서 우리 인간에게 길인 것이다. - p118
사람의 변덕을 만족시켜 주는 것이 인간의 필요를 만족시켜 준다는 뜻은 아니다. 이 필요 중 제1의 것 – 그것은 진실이다 – p121
생활의 도상에는 금화들이 흩어져 있지만 여행의 목적만을 생각한 나머지 발 밑에 흩어져 있는 금화들에 관심을 갖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 사실들을 모른다. 설령 알아차렸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줍기 위해 몸을 숙일 수는 없다. 왜냐하면 <생활의 마차>는 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앞으로 밀어내기 때문이다. 이것이 현실에 대한 우리의 관계이다. 그러다가 우리는 역에 도착했고 따분하게 말을 기다리며 이리저리 배회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주의를 기울일 필요조차 없는 얇은 금속판 하나를 주의 깊게 쳐다보고 있다. 이것이 예술에 대한 우리의 관계이다..... 예술 작품은 은행권이다. 내적 가치는 희박하지만 사회 전체가 그 가치를 인정하고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은 그것을 귀중히 여긴다.... 예술의 힘은 보통 회상의 힘이다. 예술 작품은 그 미완성과 부정성에 힘입어 우리의 회상을 상기시킨다. 다시 말하면 보통 예술 작품은 실재하는 개개의 형상이나 사건이 아니라 <일반적 장면> 일뿐이다. - p123
현실에서의 바다에 도취할 수 있는 사람이 원할 때마다 항상 바다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때로는 바다를 회상하기도 한다. 하지만 상상력은 허약해서 받쳐주는 것이 필요하다. 바다에 대한 회상을 생생하게 하고 자신의 상상 속에 남아있는 바다를 좀 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사람들은 바다를 묘사한 그림을 본다...... 예외 없이 모든 예술 작품에 해당하는 예술의 첫 번째 의의는 자연과 생활의 재현이다. - p126
예술작품의 목적과 의의 또한 이와 같아서, 현실을 바꾸지도 장식하지도 않으면서 현실을 재현하고 현실의 대용품을 제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예술의 첫 번째 목적은 현실의 재현이다. - p127
자연과 생활 속에는 모든 것이 구체적이다. 재현은 중요성에 따라 재현되는 것의 본질을 유지해야만 한다. 따라서 예술 창작은 가능한 한 덜 추상적인 것을 포함하고, 중요성에 따라 생명감 있는 광경 속에서 개별적인 형상 속에서 보다 구체적인 것을 포함하는 그런 작품을 지향하지 않으면 안 된다. - p132
예술의 본질적인 의의는 현실 속에서 인간이 관심을 갖는 것, 그것의 재현이다. - p138
판타지와 비교하여 현실을 옹호하고 예술 작품은 실재하는 현실과 비교할 수 없다는 점을 증명하고자 하는 것이 이 논문의 주안점이다. 필자처럼 예술을 말하는 것은 예술을 멸시하는 것이 아닐까? 예술 작품의 예술적 완전무결함에 있어 예술이 실제 생활보다 하위에 있다는 점을 증명했다면 예술을 멸시한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지나친 칭찬에 반대하는 것이 곧 비난자가 되는 것을 뜻하지는 않는다. 학문은 현실보다 상위에 있으려고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학문에게는 수치이다. 예술도 현실보다 상위에 있으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것은 예술에게는 모욕이다. 학문은 그것의 목적이 현실을 이해, 설명하고 그다음에는 그 설명한 바를 인간의 선에 사용하는 것이라고 말하는 데 수치감을 느끼지 않는다. 예술도 그의 목적을 인정하는 데 수치감을 느끼지 않도록 해야 한다. 현실이 제공하는 매우 완전한 미적 향수에 결핍이 있는 경우 인간에 대한 보상은 힘이 미치는 한 귀중한 현실을 재현하고 인간의 선을 위하여 그것을 설명하는 것이다 – p1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