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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채원 May 18. 2020

보이는 손

통근길 독서일기 8.  

2권에 1,200 페이지에 이르는 비싼 책을 읽기란 쉽지 않다. 이 책은 <바이마르의 세기>와 마찬가지로 특수한 관심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유익할지 모르겠다. 미국 기업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 필히 읽어야 할 권위적인 저서로 꼽히는 책이지만 실용적인 목적으로 읽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대신 전문적인 연구자나 실제로 기업 활동에 대한 연구를 수행하는 사람들, 그리고 미국 기업의 역사에 주목하는 사람들에게는 매우 유익한 책이 되리라 믿는다. 

 

책을 읽어본 사람들은 기업의 보편적인 운영 원리라든가, 선대제와 방물장수로부터 초국적 자본까지 이르는 기업의 역사를 일별 하기에는 아직 <보이는 손>을 능가하는 책은 없을 것이라고들 한다. 나는 책의 제목 <보이는 손>에서 엿보이는 구체성이 특히 마음에 들었다. '보이는 손'이란 애덤 스미스가 시장의 원리를 설명하기 위해 도입한 비유다. 챈들러는 시장이란 사실 고유의 원리에 의해 운영되는 것이 아니라 '기업'이라는 명확한 주체와 그 주체가 생존을 위해 꾸리는 전략의 산물임을 명기한다. 기업이라는 '보이는 손들'이 바삐 움직이고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는 가운데 창업자와 가족 경영진이 일선에서 물러나고 '전문 경영인'이라는 일종의 테크노크라트가 등장해 점차 자리를 대신하게 되는 과정을 서술하고 있다. 


<보이는 손>에서 현대적인 기업의 효시로 꼽는 기업은 우리가 늘 교과서에서 접하는 방직, 방적과 같은 섬유 산업이 아니다. 최초로 근대적인 경영구조를 갖춘 기업은 바로 무기 제조업체이자 소총으로 유명한 '스프링필드 아머리'였다. 스프링필드 아머리에서 처음으로 품질 검수와 관리, 그리고 회계 감사 시스템이 처음으로 도입이 되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영을 전담하는 전문적인 부서들의 위계질서와 분업구조를 갖춘 기업의 등장은 철도의 성장이 있고부터 시작되었다. 미국의 지형은 서쪽의 산맥과 동쪽의 광활한 대평원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19세기 초반까지는 평원을 가로지르는 강과 운하가 모든 물동량을 소화함으로써 그런대로 전 국토를 포괄하는 유통망을 유지해왔다. 하지만 수로 운송만으로는 날로 점증하는 유통량을 소화하기는 힘들었다. 각각의 철도회사들이 연합해 표준에 맞는 철로를 부설하고 모든 점들이 선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전국적인 철도망이 형성되자, 이런 유통망을 유지하기 위해서 철도회사들은 합병을 거듭했고 거대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업 구조는 재편되어야 했다. 그 과정에서 개개의 독립된 부서들은 점차 전문성을 띠게 되었고 각 철도회사의 전문가들은 협회를 결성해 교류하기 시작했다. 이런 협회들은 현대에 와서 더욱 활성화되어 훗날 기업 테크노크라트의 산실이 된다. 


전국적인 유통망이 철도를 통해 형성되며 시장이 개척되자, 자연스레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한 대단위 생산 설비가 완비되기 시작했다. 석유 산업을 필두로 해서 농산물에 이르기까지 대량 생산 체제가 완비되었다. 챈들러는 이런 대량 생산과 대량 유통이 결합되자마자, 근대적이 기업들이 출현하기 시작했고 그 경영을 전문적인 경영인들이 맡게 되었다고 한다. 그 결과로 19세기 후반에 등장한 기업들이 19세기 중반의 기업들보다 1970년대의 기업들과 구조나 기능 면에서 더욱 유사하다고 주장한다. 광대한 영역에 뻗어있는 각종 사무소와 기간 시설을 유지하기 위해서 기업 내부의 각종 전담 부서와 부서들 간의 위계질서 성립은 필수적이었다. 이 책의 흥미로운 부분은 마치 창세기의 묘사처럼 기업들의 형성이 다른 기업 기반의 형성에 빚지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철도부설로 인한 유통혁명은 한편으로는 엄청난 소비 수요를 촉진하면서 생산 혁명을, 다른 한편으로는 전신과 우편을 통한 통신혁명을 이끌어냈다. 생산량이 증가하자, 이를 취급하는 도, 소매업도 성장했고 도, 소매업의 확대와 말미암아 백화점이 등장하고 통신 판매가 활성화되었다. 백화점은 대기업화된 도, 소매업의 총화로서 상품을 소비자들에게 소개하고 소비하도록 하는 전략을 요구했는데, 이런 전략적 수요는 다시 광고업의 성장에 발판이 되었다. 


국가나 군부가 발전을 주도하는 여타의 국가와 달리, 미국의 특수성은 철도 회사와 같은 민간 기업의 성장을 통해서 사회의 윤곽을 그려왔다는 점이다. 기업들이 성장하기 위해서는 동부 자본가들의 지원은 필수적이었고, 이를 통해서 금융자본이 성장했다. 또 기업과 기업 간의 결합이 촉진되면서 이와 관련한 법률 서비스 시장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소위 금융혁신과 법률 혁신은 기업들이 한 단계 더 높이 도약하기 위한 발판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미국 대학들은 기업들의 지원을 통해 성장하면서 기업의 입맛에 맞는 맞춤형 인재들을 양성하기 위한 로스쿨, 비즈니스 스쿨을 설립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 것들이 원환을 그리면서 미국 자본주의의 강력한 자장을 형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보이는 손>은 제목부터 마음에 드는 책이었다. 대기업이 미국을 형성했으며 미국을 움직이는 힘이 미국의 대기업에서 나온다는 사실.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자연화된 시장의 힘이 실상은 대기업이라는 보이는 손의 움직임에 의해 강력하게 영향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방대한 사료로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이 책을 읽고 어느 정도 이해했다고 자부하기는 힘들다. 내가 잘 알고 있는 분야도 아니었거니와, 향후 기업 취재에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처음의 기대와도 부합하는 책은 아니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하지만 미국을 움직이는 힘이 어떻게 확장되어왔는지 일별하기에는 좋은 책이었다. 한국에서도 재계 거물의 위업을 강조하거나 가십에 매몰되는 책을 넘어 이런 연구가 나오면 기꺼운 마음으로 읽을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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