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근길 독서일기 9.
스티븐 그린블랫 <폭군>
출간 배경은 트럼프의 등장 시기와 겹친다. 이 책이 <리어왕>과 같은 비극에서부터 <헨리 6세>, <리처드 3세>에 이르는 시대극까지 망라하는 이유는 저자가 셰익스피어의 정치적 문제의식을 드러낼 수 있는 작품이었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 여왕 치세 동안 당대 비판이 어려웠던 셰익스피어는 먼 고대 로마나 영국의 옛 역사를 항시 차용할 수밖에 없었다. 반란의 무리가 봉기 전에 셰익스피어의 시대극 상연을 의뢰했던 역사적 사실은 셰익스피어로 하여금 더욱 조심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이런 역사적 상황에서 셰익스피어의 보편성은 더욱 빛을 발한다. 그린블랫은 시대착오적인 정치의식을 정당화하기는커녕 한 발 더 앞서 시대적 요구를 잘 형상화한 작품들 속에서 미국의 정치적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 나아갈지에 대한 지혜를 추출하고자 했다. 그러면서도 민주주의의 종주국인 미국에서 트럼프의 등장은 독재의 전주곡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 또한 감추지 않고 있다.
실망스러웠던 <나보코프 문학 강의>와는 달리 이 책은 문학을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대한 전범을 교시하는 것 같다. 작품의 배경과 역사적 상황을 설명하고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보여주고, 자신의 의견을 설득력 있게 제시하는 모습을 보면, 이게 문학 비평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가 아니었을까 싶다. 현재의 문학 비평은 정상적으로 대학 교육을 마친 독자들이 한 문장, 한 문장 해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난문들을 생산하는 데만 몰두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비평적 태도들이야말로 언어적 실험이라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면서 일반 대중을 문학으로부터, 예술로부터 더욱 멀어지게 하는 '전도된 반(反) 지성주의'의 모습이다. 특히 일부 국문학 연구자들이 천편일률적으로 애용하는 '발화한다', '분절한다' 등의 국어도 아니고, 문학용어는 더더욱 아닌 그런 말들이 사람들을 얼마나 피곤하게 만들고 있는지. 그런 점에서 그린블랫의 책은 로저 에버트가 영화에서 해왔던 작업을 셰익스피어 극에서 보여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징하고 대중적인 언어로 독자들이 셰익스피어의 매력에 흠뻑 빠질 수 있도록 여지를 열어두는 그런 책 말이다.
이 책을 읽고 나서 그린블랫의 책을 더 읽고 싶다는 생각을 굳혔다. 완벽한 책이 어디 있으랴마는 몇 가지는 못내 아쉽다. 먼저 그린블랫은 셰익스피어가 살았던 엘리자베스 1세 치세의 영국과 트럼프의 미국 간의 유사성을 강조하기 위해 당시의 영국을 혼란하고 억압적인 시기인 것처럼 그리고 있는데, 과한 묘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셰익스피어의 정치적 지향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물론 문학의 현신이라 할 만큼 탁월한 작가였고 그의 작품은 현재에도 호소력을 지닐 만큼 보편성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 개인이 시대적 전망과 상황을 초월할 정도였는가 하는 문제는 쉽게 단언할 수밖에 없다. 또 민주주의와 독재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을 반복함으로써 고루함을 피할 수 없다. 이 책에서 사용되는 민주주의와 독재의 용법은 실상 냉전시대의 수사와는 다를 바가 없는 것 같다.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민주주의는 무엇이었을까? 민주주의는 이념일까, 형식일까, 제도일까? 제도가 일정의 선을 보증할 수 있겠지만 제도 속에서 선을 찾으려는 시도는 파랑새와 행복을 동일시하는 행위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익스피어 극에 드러난 정치의식이 현재에도 호소력을 지닌다는 점, 막막한 정치적 상황 하에서 고전이 줄 수 있는 위안을 잘 보여주고 있다는 점은 이 책의 탁월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