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근길 독서일기 10.
로버트 러들럼 <본 아이덴티티>
전 세계적으로 3억부나 팔린 소설답게 엄청난 위력을 과시하는 '페이지 터너'다. 이른바 '서양 무협지'. 다만 화려한 액션 묘사로 승부하는 것이 아니라, 단서를 하나 하나 쫓아가면서 적들을 처치한다는 점에서 제이슨 본은 리 차일드가 후대에 창조한 '잭 리처'의 원형 격인 캐릭터다. 스파이 소설로 분류되기도 하지만 여기 나오는 첩보기관의 역할은 부수적인 역할 밖에는 못하고 있다. 제이슨 본의 활약을 보노라면 떠오르는 캐릭터는 <고르고 13> . 여기에 나오는 듀크 토고처럼 돌격소총으로 원거리 저격을 한다든가 하는 초인적인 능력은 없지만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뛰어난 지능과 완력으로 제압하며 상황에서 순식간에 떠오르는 직감으로 모든 일을, 그것도 아주 제대로 해결한다는 점은 현실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일지언정 엄청난 쾌감을 준다.
불의의 일격을 당한 주인공이 바다에 빠졌다 해변으로 밀려오면서 기억에서 회복한다는 설정은 벨기에 만화가 장 반 암므, 윌리엄 방스 콤비의 XIII (서틴)에서도 변주(표절)되는데 원작은 표절작인 XIII보다도 깊이가 없어 보인다. 보통 장르물을 즐기는 사람들 사이에서 영화를 먼저 보고 소설을 읽으라는 말이 있다. 왜냐하면 앞서 본 영화의 이미지가 소설의 내용을 시각화하는 데 용이하도록 만들고, 또 영화에서는 감지하지 못한 부수적 정보들을 부연해주기 때문일 것이다. 만약 영화와 소설 중에서 꼽으라면 나는 단연 영화의 손을 들어주고 싶다. 디지털이라고는 손목 시계로밖에 존재하지 않던 냉전시대의 향수를 물씬 풍기는 매력이 있지만, 당시의 여성을 주인공의 구출만을 기다리는 수동적인 존재로 묘사하는 부분 또한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확연한 시대착오 같다.다. 게다가 남녀가 정사 후에 남성은 하대를 하고 여성은 존대를 하는 투의 번역 또한 굳이 그 당시의 감수성을 따를 필요가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잘 읽히지만 이제는 시대에 뒤떨어진 낡은 스릴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