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작 일기
"(탐사보도 프로그램에서) 연출이란 상황의 우발성을 최대한 이용해 최선의 목적을 달성하는 목표지향적인 기술이다."
나중에 <PD수첩> 연출 경험으로 글을 써보고 싶었지만, 첫 문장을 쓰고 나서 더 이상 아무것도 쓸 수 없었다. 저 한 문장이 내가 <PD수첩>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최대치인 것 같다. 피디들은 항상 현장에서 치열한 경험을 통해 배운다. 마음씨 좋고 배려심이 있는 선배를 만나면 현장에서 연출은 어떻게 하는지 소상히 알려주기도 하지만 이렇게 운이 좋은 경우는 드물다. 대개 시간에 쫓겨 바로 현장으로 나가고 시행착오 끝에 배운다. 나는 조연출을 그다지 잘 가르치는 편이 아니다. 조연출을 현장에 잘 내보내지도 않는다. "일이 잘 되게 하려면 직접 하라"는 나폴레옹의 격언에 따라 내가 먼저 나간다. 중요한 취재 현장을 내가 장악하고 나서 비교적 접근이 용이하거나 구성상 중요도가 떨어지는 부분을 조연출에게 맡긴다. 내가 뭔가를 조연출에게 알려줄 때는 일을 시키기 불안할 때뿐이다. 실상은 사람을 잘 믿지 못해서이지만 조연출 후배들은 나를 사람을 잘 쉬게 해 주는, 배려심이 있는 선배로 오해하곤 한다. 그러다 보면 주변에서 사람이 크지 못한다. 후배들은 나를 일 덜 시키고 좋은 선배로 기억하겠지만, 내 과거를 되돌아보면 잔혹스러우리만치 일을 못하는 선배들에 대한 환멸 그리고 현장에서 뭔가를 해내야 한다는 중압감이 나를 더욱 키운 것 같다. 평소에 조연출들에게 이런저런 방향을 알려주는 대신에 막막한 현장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팁 정도를 모아 매뉴얼을 써보려고 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글을 쓰기 어려워서가 아니라 말을 할 수 없어서다. 쓰고 있는 문장에서 한 발짝만 더 나가면 영업 비밀이 노출되기 때문이다. 역량이 각별히 뛰어난 사람들도 있지만, <PD수첩>, <불만제로>를 연출하면서 전수되어 오는 비전들은 현장의 피디와 작가들이 갖은 고뇌 끝에 만들어낸 기술들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알아낸 것인 양 자랑할 것이 못 되며, 취재원들이 알게 되면 향후 취재에도 지장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알리고 싶어도 자제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을 키우기 위해 매뉴얼을 만들어보겠다는 포부도 잠시 뿐 아무런 문장도 잇지 못하고 있다. <PD수첩>, <불만제로>가 쌓아온 노하우들, 타사와 대별되며 현장에서 탁월함을 보여주었던 보증수표들이 사라져 가는 모습을 안타까워하면서 말이다.
그래도 말을 꺼낸 김에 매우 초보적인 탐문 기술을 하나 소개하자면, 로버트 러들럼의 소설 <본 아이덴티티>의 한 장면이 탐문의 좋은 예시라고 할 수 있다.
<본 아이덴티티>의 주인공 제이슨 본은 이름 모를 남프랑스의 마을에 가서, 주민들에게 이렇게 묻는다. 원문을 간단히 요약하면, "여기가 당부아 후작이 사나?" "아니, 드 샹보르 후작이 산다.", "키가 매우 크신가?", "아니, 크다 해도 당신 정도다." 여기서 제이슨 본은 아무 이름이나 대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정보를 천연덕스럽게 내세워서 자신이 얻고자 하는 정보를 얻는다. 그래서 그 마을에는 제이슨 본과 비슷한 키의 드 샹보르 후작이 산다는 정보를 얻었다. 이 대목을 실제 사례에 접목하면 다음과 같다.
언젠가 특정 부동산을 소유, 임대, 관리하는 법인을 취재해야 할 일이 있었다. 하지만 법인의 관리자는 경계심이 강했고, 부동산 임대법인임을 인정할 리가 만무했다. 하지만 방송에 쓰기 위해서 그는 그 사실을 카메라 앞에서 인정해야 했다. 그럴 경우, 최초의 탐문 요령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질문을 중구난방으로 묻는다. 질문은 피디의 머릿속에 순서대로 배열되지만 입 밖으로 나올 때는 듣는 사람의 혼란을 가중시켜야 한다. 최대한 어수룩하게 보이고 적절하지 못한 질문을 많이 흘리다, 중요한 질문을 하나 섞는다. 취재원이 탐문자에게 우월감을 갖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많은 말을 한다.
취재원의 경계를 풀기 위한 사전 대화
"여기가 식품 회사인가요?" : 나쁜 질문
"아닌데요!" : 나쁜 질문을 부인, 부정의 부정은 암묵적인 긍정이므로 덫에 미끼가 발을 내밈
"아래층 어디서 식품 회사라고 하는 것 같던데...." : 잘못된 정보로 취재원을 자극
"누가 그래요?" : 취재원의 의심으로 재차 확인
"아닌데, 내가 알기로는 아닌데?" : 제작진이 아무런 정보가 없음을 가장하여 취재원을 재차 자극
"이봐요, 똑바로 좀 아세요! 우린 부동산 회사예요." : 정확한 정보 도출
"아, 내가 잘못 알았나?" : 취재원을 안심시키기 위한 멘트
취재원의 경계를 풀기 위한 사후 대화
일견 간단한 탐문 같지만 굉장히 복잡한 과정을 취하고 있다. 여기서 취재 윤리를 어기지는 않지만 그 경계선상을 아슬아슬하게 배회하는 질문으로 답변을 유도한다. 가장 유념해야 할 부분은 적대적인 취재원이라면 태도가 적대적일수록 그의 머릿속을 최대한 헝클어뜨려야 한다는 점이다. 머릿속으로 질문 순서를 잘 배열해서 기억하되, 물을 때는 두서없이 묻는다. 일종의 '맥도널드 효과'를 활용한다. 맥도널드 효과란, 상대에게 불리하거나 부정적인 것을 먼저 제시함으로써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유도하는 기술을 말한다. 보통 수동적인 구성원의 의견 도출을 위해 사용된다. 예컨대 회사 부장이 "오늘 점심 뭘 먹을까?" "(일동).....", "그럼 늘 가던 맥도널드로 하지!" 하면 직원들이 허겁지겁 다른 대안을 찾는 것과 같다. 뭐 대단한 것인 양 써놓았지만 신입 피디들도 알만한 간단한 팁이다. 현장에 답이 있고 지향이 있으면 방법을 찾게 되어 있다. 하지만 현장이 답을 주려면 우리는 일찍 현장에 도착해서 한 번 둘러봐야 한다. 그리고 현재 어떤 상황인지, 전체 프로그램의 맥락에서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효과적인 구성이 되려면 어떤 정보가 필요한지를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베테랑 수사관들은 초기 주변인의 탐문의 깊이에 따라 수사의 향방이 달라진다고들 한다. 취재도 마찬가지다. 취재 초반에 어떻게 묻고 어떤 대답을 얻느냐에 따라서 취재의 질은 충분히 달라질 수 있다. <4대 강, 가짜 뉴스 그리고 정치인>을 연출한 뒤 인터뷰에서 서울에서 아무것도 모르는 어수룩한 피디가 내려가니 순박한 시골사람들이 다 말해주더라는 말이 나왔고 나는 애써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게 포장하는 편이 <PD수첩>을 위해 나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진실은 온갖 심리전과 탐문 기술로 훈련된 탐사보도 피디가 아직은 경계심의 벽이 높지 않은 지방에 내려가 거의 양민학살 수준의 퍼포먼스를 펼쳤다는 게 어찌 보면 진실에 가까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