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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채원 Jul 31. 2020

혁명과 모더니즘

통근길 독서일기 12.

이장욱 <혁명과 모더니즘>


모국어로 된 잘 쓴 글을 읽을 때면 행복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문학이나 문학이론 관련 책들을 별로 손대지 않는 편인데, 오랜만에 시 비평과 문학 이론에 관한 책을 꺼내 들었다. 트위터에 소개된 단편적인 문장들이 마음에 들어서다. 문학 비평을 멀리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기이한 문장들의 기예가 나를 한없이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또 그런 기예들이 꾸준한 학습의 발로가 아니라는 점이 더 크다. 문장을 쓴다기보다는 서양의 돌아가신 인물들에 빙의되어 말하는 방언에 가깝다는 점. 자신을 납득시키지 못하는 글이 타인에게 어떤 영향을 끼치기를 바라고 썼는지. 회사일에 찌든 사람이 문장의 지고한 위치를 감히 논하느냐고 되묻는다면 할 말은 없지만, 적어도 알고 쓴 글인지 모르고 쓴 글인지는 구분할 만한 분별력은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의 서두에서 눈길을 끄는 부분은 러시아 문학에 드러나는 정신적 특질이다. 저자는 정신적 특질로서 첫째, 반로고스주의를 들고 있다. 러시아의 반로고스주의는 정교의 전통에서 비롯한 것으로 인간의 언어로는 신의 존재를  드러낼 수 없다는 데서 비롯된다. 그래서 신성은 오로지 '부정이라는 방법 via negativa'을 통해서만 드러날 수 있다. 예컨대 '신이란 이런 것이다'라고 정의 내리는 것이 아니라, '신이란 이렇지 않다'는 부정을 통해서만 신성이 드러난다는 점이다. 또 15세기 중반 오스만 튀르크가 정교의 본향인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킨 대사건은 '모스크바 제3로마설'이라는 정치적,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귀착되었다는 점이다. 로마, 콘스탄티노플을 대신해 모스크바가 정교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사실은 러시아가 개별적 구체성을 포괄하는 보편성의 이름으로 등장하는 계기가 되었다.   


앞부분은 러시아 시인들에 대한 시 소개와 비평문으로, 뒷부분은 문학 이론에 대한 설명으로 크게 이루어져 교양서로 또 문학이론에 대한 일종의 개론서로도 손색이 없다. 서문에 나타난 저자의 우려 섞인 겸손과는 달리, 국내에서 이 정도로 해외의 이론을 잘 소화해내 자기 글에 투영시킬 수 있는 사람은 드물지 않을까 싶다. 특히 문학에서 루카치/ 브레히트 논쟁이라든지, 리얼리즘과 모더니즘의 관계랄지, 이런 분야에 관심 있는 사람이 초반에 개념을 다지는 데 좋은 책이다. '리얼리즘', '소격 효과'와 '낯설게 하기'의 차이, '아방가르드' 등 들어는 봤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개념들을 나름으로 정립해두어서 이해가 용이하도록 했다. 저자가 의식적으로 더 쉽게 쓰려는 노력을 했다면 더 좋았겠지만 (특히 '미만하다'와 같은 이중적인 의미를 지녀 맥락을 통해 의미를 유추해야 하는 단어는 지양해야 한다.) 거부감이 드는 문체가 아니라서 편안하게 교양서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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