삐딱한 사람이 정말 몇 명만이 눈길을 주는 서평을 써서, 또, 애써, 굳이 애먼 사람을 욕 먹이는 것이 아닌가 모르겠지만, 나는 존 맥피를 읽고 교훈을 하나 얻었다. "트위터에 쓸데없는 사람들의 말만 믿고 책을 구입하지 말자. 악마에게서도 선의를 발견하려는 착한 사람들의 말에 관심을 두지 말자. 그들의 선의만큼이나 고루한 사람들의 얘기니까." 트위터에서 여러 사람들의 추천을 받고 이 책을 구입했다. <뉴요커>의 기자이며 프린스턴 대학에서 글쓰기를 가르친다는 저자의 명성이 책의 내용을 보증해줬고, 창작자와 회사원의 경계인으로서 이 책의 제목에 극력 공감했다. 그리고 남는 것은?
이 책에서 좋았던 부분은 위 사진에 적혀있는 단상, 그리고 <가만한 당신>의 최윤필 기자가 적어놓은 유려한 추천사뿐이었다. 나머지는 마음씨 좋고 여유롭게 사는, 사람 좋은 미국 아저씨가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투고한 수필 수준의 글이다. 나는 왜 이 지루한 책이 그토록 찬사를 받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노먼 메일러, 트루먼 카포티라는 전 세대의 작가와 다른 문맥을 창조해냈다고 하지만, 이 사람들은 과시적인 속물이었지는 몰라도 적어도 이 사회에 대해 할 말은 있었다. 제1세계의 백인 남성, 인생의 굴곡이라고는 응원하는 스포츠 팀이 패배하거나 아까운 낚싯감을 놓쳤을 때뿐인 한가로운 중산층. 태양에 가까운 위성이 더 많은 빛을 받듯이, 이 작가는 최강대국의 지적 중심의 주변을 맴돌고 있기 때문에 터무니없는 혜택을 받았고, 다시 그 혜택은 고결한 문장의 이름 아래 자연스러운 것이 된다. 자신에 대해 쓴 글은 별 볼일 없지만 소피아 로렌, 피터 셀러스, 캐리 그랜트와 같이 남에 대해 쓴 글은 그래도 조금은 빛이 난다. 나에 대해서는 못 쓰고 남에 대해서는 잘 쓴다는 이타적인 면모가 유일한 위안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렇게 지루한가? 일전에 나보코프의 책을 평할 때도 그랬듯이, 끝없이 펼쳐지는 지루한 세부 묘사. 더 알고 싶지 않지만 계속 지면을 채워나가는 그 섬세하디 섬세한 감각. 이런 감각은 전적으로 여유의 소산이다. 노동을 적게 하고 자신의 시간을 능동적으로 제어할 수 있는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말들. 가난한 사람에게 버터는 하나다. 하지만 여유 있는 사람들에게 A브랜드의 버터와 B브랜드의 버터는 천국과 지옥의 차이이며 생사를 가르는 문제가 된다. 나는 맥피의 글을 실패한 글쓰기로 규정할 수 있다면 이런 세부에 너무 매달려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세부 묘사는 글을 맛깔스럽게 할 때 향신료 같은 주요한 역할을 하며 작가의 직관적인 통찰이 얼마나 유효한가를 보증한다. 더 나아가 나는 디테일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하는 디테일은 한정된 자원의 압박이 빚어내는 전경화된 언어들 사이에서 피치 못하게 배어져 나오는 우연의 소산이다. 롤랑 바르트가 말한 '푼크툼'이 아마 이런 맥락에서 나온 말일 것이다. 하지만 지면을 지리하게 메우는 끊임없는 디테일의 연쇄는 안일함에서 비롯된다고 생각한다. 니체의 말마따나 '피'로 쓸 필요까지는 없을지 몰라도 안일한 작가와 순진한 평자 간의 포틀럭 파티에 나는 아무것도 들고 가고 싶지가 않다.
또 맥피로부터의 교훈 하나 더. 존 맥피는 뉴욕에서 자기 차문을 열다 경찰로부터 오해를 받았던 일화를 자랑스럽게 설명하고 있다. 뉴욕 경찰은 맥피를 도둑으로 의심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서 그가 만약 도둑이었다면 그렇게 자랑스럽게 자기 차 문을 열고 있다고 경관에게 말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고 대답한다. 존 맥피가 흑인이라면 어땠을까? 아마 글을 쓰려고 펜대를 잡기도 전에 저 세상에 가 있지 않았을까? 나는 내가 가진 것들을 남이 갖고 있으면 싫다. 그래서 내가 무신경한만큼이나 무신경한 작가들을 증오한다. 어쨌든 그래서 또 하나의 교훈을 얻었다. "이 세상에서 백인의 하얀 피부는 얼마나 단단한 갑옷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