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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채원 May 26. 2023

시사를 마치고

다큐 입문기 4. 

방송이 나가려면 시사라는 과정을 통과해야 한다. 높으신 분들이 오셔서 편집본을 보고 크게는 방송 여부, 작게는 구성의 방향성이라든가 방송 후에 따를 위험성을 고려하는 절차다. 모든 사회생활이 그렇듯이, 방송 경험이 풍부하고 리더십이 있는 보직자가 시사를 하면 원포인트 레슨처럼 유익한 경험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관성에 의해 살면서 말하고자 하는 의욕이 큰 보직자를 만나면 서로 감정만 상하기 일쑤다. 신임 국장이 취임하고 조직의 분위기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체감한다. 제작진의 수고에 대한 치하와 몇몇 기술적인 보완점들만 지적되고 좋은 방향으로 끝났다. 파업의 영향인지, 아니면 개인의 문제인지는 몰라도 기존의 시사는 시대착오적인 경험을 이식하고 얼마나 자잘한 지적을 구구절절 늘어놓는가로 변질되는 일이 흔했다. "이 편집 방향이 옳은지에 대한 식견은 없으나 내가 어른으로서 한마디 해야겠다"는 식의 지적들로 얼마나 많은 고통을 받았는가. 그러나 지금이 내가 겪을 수 있는 몇 안 되는 호시절일 것 같아 두렵다. 


나는 PD가 중심만 잘 잡는다면 되도록 많은 의견을 수렴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특히 선구안이 좋고 제작능력에 신뢰가 가는 사람들의 의견은 귀중하다. 이번 1부 편집본 반응은 세대에 따라 갈린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여기서 아카이브의 위력을 실감한다. 젊은 후배 세대들에게는 생소하고 신선한 화면이고, 나이 든 세대들에게는 익숙하지만 오랜만에 재회하는 반가운 화면이 되는 것. 아카이브는 지상파 방송만의 특권이자 특성이다. 특권이라 함은 신생 방송사들이 따라올 수 없는 70년대부터 누적되어 온 자료들을 독점할 수 있다는 뜻이고, 특성이라 함은 그동안 세대가 다른 사람들을 한 곳에 불러 모을 수 있는 매체의 성격을 말한다. TV의 위기를, 마치 고루한 매체의 자연사처럼 받아들이거나, 저 잘난 맛에 사는 재수 없는 방송국 놈들이 고통받아 마땅하다는 생각을 소셜 미디어에서나 오프라인에서 자주 접한다. '저런 것들 시청료도 내면 안 돼.' 혹은 '이제 누가 TV를 보나?' 물론 시대의 변화를 따르는 것은 맞다. 하지만 변화를 따라가면서 놓치고 있는 것은 없을까? 현재의 뉴미디어가 올드 미디어에 좋은 대안이 되어줄 수 있을까?


매체가 발달하고, 세분화된 결과는 결국 공론장의 상실을 불러온다. 매체가 개인화되면서 공동체를 구성하는 합의들이 무시되고, 개인의 주관적 망상이 특권화된다. 여론이 형성되지 못하고 그 결과 소통 부재를 통해 서로에 대한 혐오와 비난 정서가 확산되고, 정치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주체들이 점차 개별화되고, 왜소화 된다. 그러다 보면 점점 공동체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스스로 고독사를 택하거나 심지어 서로를 파멸시키는 것은 아닐까? TV의 위력을 과신하는 얘기로 비칠 수도 있다. 방송국 밥을 먹으면서 좁아진 시야 때문에 TV라는 매체를 너무 추켜세우는 것은 아닐까도 싶지만 '어제 그 프로그램에 누구 나온 것 봤어?' 같은 얘기가 언제부터인가 힘을 잃었다. 굳이 TV를 거론하지 않아도 우리 발 밑에서 어떤 공통의 지반이 붕괴하고 있음을 저마다 느끼고 있지는 않을까? 그것은 먹고살기 위해 하루를 맹목적으로 살아야 하는 우리의 책임일까? 그렇다면 서로 다른 시선으로 보더라도 같은 감정을 공유할 수 있는 장이 적어도 TV에서 마련될 수는 없을까? 1부에 이런 얘기들을 담아보고 싶었다. 90년대 들어 개성을 강조하고 과시하는 세대들이 등장했지만 결국 이들은 물질주의, 배금주의가 빚어낸 환상 속에서 허우적대다, 그 돌파구로 파멸을 택한다. 나는 이 파멸의 신화 속에서 많은 사고와 감정들과 얘기들이 공유되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상황에 대한 판단은 시청자에게 맡기겠지만, 목소리를 내야 할 때는 과감히 내 목소리를 실었다. 창작의 첫걸음은 수치심을 극복하는 것이다. 세상에 뭔가를 낼 때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고 믿는다. 그에 대한 판단은 내 몫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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