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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채원 Sep 29. 2019

한남동 떡볶이집의 역사

발터 벤야민이 소개한 일화 중에 산딸기 오믈렛에 관한 일화가 있다. 우리나라의 도루묵 전설과도 비슷한 얘기다. 옛날 모든 것을 가진 왕이 살았는데, 어떤 영화에도 만족하지 못하고 오로지 젊었을 적 맛있게 먹었던 산딸기 오믈렛을 다시 한번 먹기만을 소원했다.


내게 떡볶이란 산딸기 오믈렛과도 같다. 어떤 산해진미도 내 기억 속에 일회적으로 남아 있는 떡볶이 한 조각, 오뎅국물 한 모금만 못하다. 틈나는대로 서울 시내를 돌아다니면서  잘 한다는 떡볶이집을 다니는 이유는 유년기의 그 맛을 재현해보려는 무용한 시도들이다.


내가 다시 한번 먹어보고 싶은 떡볶이 중의 으뜸은 간판도 없는 포장마차 떡볶이다. 한남동 오거리에서 한남동 원주민들이 지칭하는 말로 산동네, 그러니까 한광교회를 포함한 산비탈의 주택밀집지역 쪽으로 내려가다 보면 한남동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누구나 아는 '우주문방구'가 있었다. 우주문방구 가는 길, 지금은 장수족발 오른편으로 순천향 병원 방면으로 가지처럼 뻗어있는 길 초입에 허름한 포장마차가 있었다. 주 메뉴는 떡볶이, 오뎅, 순대, 튀김. 튀김은 쥐포 튀김과 계란 튀김이 일품이었다. 떡볶이는 100원어치, 200원어치가 기본이고 300원이 넘어가면 초등학생 위장으로는 무리였다. 우리집은 비교적 학교와 가까웠기에 산동네까지 갈 일은 없었지만 친구들이 좋아서, 그리고 떡볶이 나눠먹는 재미로 항상 포장마차를 들렀었다.


세상의 영원한 것은 없다던가, 졸업 무렵 한동안 포장마차는 두꺼운 검은색 고무벨트로 묶인 채 방치되어 있었고 다른 사람 손에 넘어갔을 때는 물엿탕이 되어 맛이 변해 있었다. 원주인이었던 아줌마보다 살가웠지만 친절함으로는 해소될 수 없는 뭔가가 있었기에 자연스레 발길은 끊겼다. 그리고 시멘트 블록 담벼락이 헐리고 새 건물이 들어오면서 그 자취마저 기억하는 사람이 드물게 되었다. 포장마차 아줌마는 어찌 되었을까?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떡볶이 판 돈을 조금씩 모아 송파에 땅을 샀다고도 했고 운전기사 딸린 검은 벤츠 뒷좌석에서 내리는 모습을 본 사람이 있다고도 했다. 사실이야 어쨌든 아줌마가 잘 되기를 바라는 아이들의 마음이 이런 도시전설을 만들어냈을 지도 모르겠다.


그 다음으로 자주 가던 곳은 새마을분식인지 새마음분식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분식집이다. 제대로 된 건물에 있었기에 가격이 좀 있었고 불친절한 주인 아줌마 때문에 어른과 함께 가거나 포장마차가 문닫을 때만 가던 곳이다. 처음에는 현재 코끼리만두 부근에 있다가 나중에 그 맞은 편인 구 바이더웨이, 현 롯데마트 옆으로 옮겨 장사하다 어느새 문을 닫아버렸다. 칼칼한 맛이 아차산 신토불이와 영락없이 닮았던 곳. 여름에는 빙수도 팔았고 과조리된 계란이나 성의없는 서비스, 아줌마의 신경질도 있었지만 그래도 추억이 서린 곳.


이 두 곳이 없어지고 대학에 갈 때까지 애정을 갖고 찾았던 곳은 하나은행 건너편 현 쥬시 자리의 공간부족 떡볶이였다.  평 남짓한 공간이 길쭉하게 자리해 4명만 들어와도 꽉 차는 상호 그대로 공간이 부족한 떡볶이집이었다. 여기서는 터프한 고추장 양념에 쫄깃한 쌀떡이 일품이었는데 오뎅국물도 훌륭했다. 지나가다 피치못하게 혼밥을 해야할 사정이 되면 나는 여지없이 공간부족에 들렀다. 자주 와서인지 가끔은 더 주기도 했다. 윗동네 이태원이 점점 힙플레이스로 떠오르면서 한남동에도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바쁜 일로 오랜만에 찾았을 때는 문을 닫은 지 한참 뒤였다. 동네 사정을 잘 아는 친구는 건물주 아들이 샌드위치 가게를 낸다고 해서 그랬다더라고 전할 뿐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샌드위치 가게도 문을 닫았고. 여기저기 다녀봤지만 이집의 떡볶이는 유사한 곳도 찾지 못했다.


유년기에 접했던 이런 떡볶이들 때문인지 나는 아직도 완고할 정도로 집착하는 게 있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쌍엄지를 쳐들어도 내가 제시하는 기준에 맞지 않으면 떡볶이가 아니라고 할 정도로. 들어가는 재료들이 특정해야 하고 몇 가지가 어긋나면 다시 찾지 않는다. 가히 '떡볶이 순수령'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마늘이 들어가면 이단, 카레가루가 들어가면 부적격. 무조건 뭉근한 불에 오래 끓인 고추장, 고추가루 위주의 맛. 눌어붙어 짙어진 대파와 계란이 오르면 금상첨화다.


떡볶이에 들어간 재료들이 다 거기서 거기지만 유독 어린 시절의 맛을 재현해주는 곳은 아직도 찾지 못했다. 포장마차와 그나마 비슷했던 곳은 영천시장 원조. 하지만 TV 프로그램에 출연한 뒤, 다시 찾았을 때는 맛도 서비스도 예전과 달랐다. 새마음 분식은 남가좌 이정희도 비슷했지만 아차산 신토불이가 더 비슷한것 같다. 아쉽게도 공간부족과 같은 떡볶이 맛은 다시는 접해보지 못했다.


산딸기 오믈렛 예화에서 왕 앞에 끌려나간 요리사는 꿇어 엎디어 아뢴다. 모든 재료를 다루는 법은 알고 있지만 오믈렛을 먹을 당시의 분위기라는 결정적인 재료만큼은 다룰 수 없노라고. 떡볶이에 들어가는 재료들을 꼼꼼이 체크하고 좋다하는 곳을 모두 찾아본들, 당시의 맛이 되돌아와 나를 감격케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철학에서 말하는 진리와 같이, 그 근사치는 구할 수 있을지 모르나 구하려는 과정 자체가 의미있는 일은 아닐까? 이번 집은 좀 비슷하려나, 하는 설렘 속에서 살아가는 게 인생의 진정한 맛은 아닐까? 떡볶이의 맛을 찾아다니면서 내가 인생을 맛보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래도 너무나 그립다. 포장마차의 커튼을 걷었을 때, 튀긴 쥐포의 달큰함과 오뎅 국물의 구수함 속에서 사르르 혀끝으로 녹아내리던 떡볶이의 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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