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채원 Sep 13. 2023

대체 불가능한 존재

다큐 입문기 8. 

<심야괴담회>가 정규 프로그램으로 안착했지만 시청률 때문에 고전하고 있을 때였다. <꼬꼬무>의 성공에 감화된 윗전에서 지시사항이 떨어졌다. "범죄가 먹히는 콘텐츠 같으니 당분간 범죄실화를 다뤄보라." <심야괴담회>는 오로지 공포와 괴기만을 목표로 만들어진 프로그램이기 때문에, 갑자기 범죄 사건을 다루면 프로그램의 색이 바래질 우려가 있다. 장르에는 나름의 규칙성이 있어서 갑자기 다른 장르로 전환해 버리면 이 프로그램은 의미가 없어진다고 했다. 그러자 되돌아온 대답은 "그러면 PD를 교체할 수밖에 없다"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지는 않았더라도 내가 콘셉트를 잡고 제작에 참여한 자식 같은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누군가가 그 자식의 얼굴을 마음대로 성형해 버린다면 참을 사람이 누가 있을까? 게다가 하루 18시간 노동에 휴일도 없이 일하던 터라, "그렇다면 차라리 연출을 그만두겠다"라고 했다. 그러자 메인작가님과 코피디 겸 제작사 대표님이 만류했다. "이제 이 프로그램은 피디님만의 것이 아닙니다. 함께 하는 식솔들도 생각하셔서 순간의 분노로 일을 그르치지 마세요." 결국 지시사항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시작일 뿐, 수용할 수도 달성할 수도 없는  '지시사항'이 줄을 이었고, 호소도 해보고 항의도 해봤지만 마지막에는 '<심야괴담회>는 MBC 것이니 두고 나가라'는 말을 들었다. 


<심야괴담회>가 MBC 것이라는 말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온갖 괴담집을 탐닉하고 괴담 게시판을 드나들며, 이 프로그램의 첫 발을 떼고, 44개의 촛불과 상금이라는 아이디어를 제공한 사람을 마치 프로그램의 부속품인양 다루는 행태에 처참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관리자 입장에서는 할 말이 많을 것이다. '더 잘 되게 만들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그렇다면 그릇된 결정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을까? 범죄 아이템을 다루자 게시판에서는 'PD가 지능이 떨어져서 시청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것 같다.', '꼬꼬무가 좀 잘되는 것 같으니까 너희도 미쳤냐' 등의 반응이 올라왔다. 이상한 지시사항에 따르는 후과에 대해서 '내 판단이 잘못되었다'는 말은 들어본 적이 없다. 아무런 리더십도 검증되지 않은 사람이 오랜 과거의 흐린 업적과 친소관계에 의해 중용되면서 제작 일선을 핍박하는 행태는 비단 이명박, 박근혜 정권에서만 일어난 일이 아니다. 


<한국범죄백서>를 연출하면서 가장 염두에 두었던 일은 이런 시대착오적 관행과 상명하달식 지도편달 위주의 관리방식에 대한 무언의 항의였다. 누군가는 앞장서서 이런 관행들을 깨 나가야 우리 조직도 한 걸음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시사교양 프로그램 제작에서 보직자가 행하는 '시사'의 주된 역할은 법적 리스크 관리와 콘텐츠에 대한 품질 평가와 그에 걸맞은 편성, 유통전략을 세우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영상이론에 대한 지식의 빈곤을 알쏭달쏭한 수사로 때우거나, 사소한 컷에 집착해서 각종 수정지시를 자존심 싸움처럼 걸어대며 보직자의 권위인양 혼동하는 행위는 이제는 지양해야 한다. 예능에서는 '40세 이상은 회의에 들어오지도 말라'는 말이 돌고 있는데, 교양에서는 50대 남성이 자신의 확고한 기준에 의거해서 세상의 트렌드를 평가한다. 영상 한 번 제대로 만들어본 적 없는 사람이 콘텐츠와 콘셉트 그리고 의지 하나 만으로 돌파해서 대박을 내는 세상이다. 달라진 세상에서 구래의 도제식 교육을 고집하며 교재에도 나온 바 없이 구전으로만 전해지는 낡은 편집이론을 들이대는 일은 얼마나 시대착오적인가? 


<한국범죄백서>를 연출할 때는 돈이 없어 더 못했을 뿐이지, 방송국에서 관행처럼 내려오는 암묵적인 규칙들을 모두 파괴하거나 회피하려고 했다. 가령 시청자들에게 친절하게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자료의 출처를 모두 표기한다거나, 사건의 맥락을 잘 이해하도록 내레이션을 곁들인다거나 자막으로 풀어주는 일 말이다. 나는 시청자들의 지식수준과 취향을 관념적으로 재단해서 끼워 맞추기 식으로 만들기는 싫었다. '내가 보여주고픈 것을 보여주겠다. 단, 판단은 시청자에게 맡긴다'라고 결심했다. 다큐를 만들면서 80년대 에로영화, 70년대 일본의 임협물, 르포르타주 등을 참고하면서 함께 염두에 둔 것은 <배틀그라운드>라는 게임이었다. 이 게임의 사용자는 갑자기 막막한 환경에 떨어져서 주어진 것들을 직접 결합해서 결과를 내야 한다. 내가 영화를 볼 때 재미를 느끼는 순간은 아무런 정보 없이 영화를 보면서 사후적으로 구성된 영화의 메시지를 새삼 깨달을 때다. 나는 이런 능동적인 감상의 즐거움을 시청자들에게 선사하고 싶었다. 그래서 고루하게만 느껴지는 기존 MBC 다큐의 이미지를 쇄신하고 싶었다. 시청자들에게 친절해야 한다는 말은 옳지만 시청자들에게 어느 정도까지 친절해야 하는가는 어느 누구도 단언할 수 없다. 이제 '다큐는 낡은 형식'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렇게 단언하기까지 회사가 깊이 고민하지는 않았으리라고 본다. 오히려 다큐 쇄신의 계기들을 방기하고 애써 시대의 뒤꼍으로 묻어버리려고 한 것은 아닐까? 그리고 PD를 한낱 프로그램 제작 대리인 내지는 부속품 정도로 취급하는 풍토에 나의 꺾이지 않는 주관을 통해 항변하고 싶었다. 그리 잘 되었는지는 모르겠지만 본 사람들은 모두 누가 만들었는지 알 것 같다고 했다. 나는 그것으로 만족한다. 


 


 



작가의 이전글 봉고차와 인신매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