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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채원 Jun 21. 2023

봉고차와 인신매매

다큐 입문기 7. 

design by Studio MATCHPOINT


1부 완제가 끝났다. 1부의 주제는 '인신매매'다. 프로그램 기획 단계에서는 널리 알려진 극악 범죄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범죄 자체보다는 범죄가 가진 시대적 맥락을 탐구해보고 싶었고, '범죄의 사회사'를 주제로 한 기사를 검색하다가 80년대 횡행했던 인신매매에 관심을 갖고 스크랩해 두었다가 언젠가 90년대 후반생인 막내 작가와 밥을 먹으러 가다 나눈 대화에서 이 주제를 꼭 다뤄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PD님, 90년대 패션이 지금도 유행하는데 그때가 좋아요? 지금이 좋아요?"

(뭔가 멋있는 대답을 하고 싶었지만, 멋있는 사람이 아니므로....)

"아이고 이 양반이 클날 소리 하시네. 그때는 아주 야만의 시대였습니다. 아무 데서나 담배 피우고 길거리에서 마누라 때리고, 지금은 MZ세대가 이기적이니 이상하니 해도 조금은 문명화되었죠. 님, 옛날에 봉고차로 여자들 잡아가던 거 모르죠?"

"봉고차? 그게 뭐예요?", 

"아이 이 아이템 해야겠네."


이 주제를 다루는 나의 문제의식은 이렇다. "옛날처럼 여성들을 백주대로에서 잡아가는 일은 없어졌지만, 정말로 여성들이 살기 좋은 세상이 왔는가." <PD수첩> "문고리를 흔드는 손"을 연출할 때, 1인 여성가구의 안전 실태를 취재한 적이 있다. 여름에도 창문을 열지 못하고, 선팅 필름으로 창문을 막고, 문 앞에는 남자 신발을 놓고 '곽두팔'의 이름으로 택배를 받고 있었다. 내게는 이런 사실이 너무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그런 사실보다도 내게 주어진 사회적 기득권을 전혀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내 무지를 자각함으로써 오는 충격이 더 컸다. 한 사회의 절반이 공포로 숨죽이며 사는 사회는 정상적인 사회라고 할 수 없다. 그런 세상은 절름발이 세상이다. 


사람이 어떤 이론적 태도로 대오각성하는 일은 드물다고 본다. 오히려 직접적 경험이나 분노나 연민과 같은 일상적 감정을 통해서 스스로 잘못된 생각을 깨닫는 경우가 더 많다. 나는 소위 2030 여성들이 '극혐'한다는 '중년 한남'이지만, '극혐'의 이유를 인지하고 연대의 감정을 견지해야 한다고 본다. 파업과 유배 과정을 통해서 이 사회에서 약자로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가혹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부끄러운 얘기지만, 나는 페미니즘에 대해 잘 모른다. 관련 서적이라고는 학부 때 읽어본 벨 훅스의 입문서 정도가 전부다. 하지만 생물학적 차이로 주어지는 불리한 여건은 사회적 조건과 관계로서 극복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래서 신체적 우월성을 빌미로 벌어진 범죄는 특별히 가중처벌해야 하고, 동성 간 결혼에 찬성하고, 생리대 같은 위생용품은 사회적 비용으로 소화해서 국가에서 지급해야 한다고 믿는다. 내가 데이트 비용으로 5천원을 내면, 여자친구도 5천원을 내서, 만원의 균형을 맞춰야 한다는 더치 페이 사회가 공정이고 정의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기획안에는 '여성 인권의 현주소를 묻겠다'라고 거창하게 썼지만, 나는 이 다큐를 본 젊은 사람들이 '봉고차로 사람을 상품처럼 팔아넘기던 시대'가 엄존했음을 깨닫고, 현재를 반추하고, 더 나아가 미래를 사고할 수 있는 동력으로 삼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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