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관계가 꼭 애정만 있는건 아니니까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는 출근 후 탕비실에서 커피를 내렸다. 정말 오랜만에 미세 먼지 없이 깨끗한 날이었다. 내 눈에 '선명함' 필터라도 낀 마냥 하늘이 정말 맑고 푸르게 보였다. 하늘 사이 사이로 보이는 산과 건물도 또렷했다. 문득 이렇게 풍경은 선명한데 왜 내 인생은 미세먼지 가득히 낀 마냥 늘 아득아득할까, 싶었다. 아직은 뜨거운 커피를 호로록 한모금 마시며 작은 여유를 즐기던 중 핸드폰 메세지 알림이 울렸다. 카톡 알림이 아닌 문자 알림 소리. 나는 뭐 또 광고 문자겠지 하며 무시했다. 오늘의 특별 세일, 정육 타임 행사 어쩌고 하는 문자 말이다. 그런데 뒤이어 한번 더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이 울렸다. 그제서야 나는 매우 귀찮음을 느끼며 느릿느릿한 움직임으로 뒷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안녕하세요, 저 그 때 커피도 물도 쏟은 사람 ... 조승혁입니다. 그 때 연락처 알려주신 회사 동료분께 번호 받아서 문자 드려요. 혹시 괜찮으시다면 제가 차라도 한 잔 대접하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
그 다음 도착한 문자는 '아 너무 부담갖지는 마세요' 였다.
이런.... 그 동안 잊고 있었던 그 남자였다.
답장을 해야 하나? 그냥 읽고 씹어야 하나? 여러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몇 글자를 적다가 나는 도로 휴대폰을 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사실 차를 마시고 싶은건지, 아님 정말 부담스러워 싫은건지 내 마음조차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자리로 돌아오니 김과장이 의뭉스러운 미소로 의자에 앉은 채 내 책상으로 달려들었다.
'박과장 그 남자 연락왔어?'
'후....'
'왔구나! 왔네! 왔어왔어!'
'아 저기 좀 조용히...'
'뭐래 뭐래 밥먹재? 만나재?'
지나치게 흥분한 그녀를 나는 침묵의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내 표정을 읽었는지 그녀는 다시 침착함을 되찾으려고 했다.
그녀에게 나는 연락이 왔었고 차 한잔 하자고 하는데 아직 나는 답을 하지 않은 상태- 라고 짤막하게 설명했다. 그러자 그녀는 뭘 고민하냐며 남녀가 만나면 무조건 애정이냐고, 당장 정의 내려야 할 사이도 아닌데 인간관계에 미리 선을 너무 긋는 것도 좋지 않다고 했다.
그런가...?
요즘 베프인 정희도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중이라 자주 만나지 못하고, 민혁이도 결혼 문제로 여자친구와 티격태격하느라 친구들 만나기가 어렵긴 했다. 이성이 그립다기 보다 '대화할 사람'이 그리운 시기라고 해야 하나.
나는 휴대폰을 꺼내 답장을 보냈다.
'네, 그렇게 하시죠' 하고.
이 무미건조한 답변에 그는 명랑함 가득한 메시지로 화답했다.
우리는 토요일 점심에 만나기로 했다. 알고 보니 그와 나는 사는 동네도 비슷했다. 편하게 동네 카페에서 보기로 하고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진행상황이 궁금한지 김과장은 자꾸 내 쪽으로 흘깃 흘깃 거렸다. 그런 그녀가 귀엽기도 했다. 나는 회사 메신저 창을 열어 그녀에게 '이번주 토요일 점심 방이동 카페' 라고만 보냈다. 메시지를 받은 그녀는 소리없이 발구르기를 하며 나에게 쌍따봉을 날렸다.
상대방의 우주를 알아가는 것
경험치가 쌓이고 사람과의 관계에 대한 노련미가 어느 정도 쌓이면서 상대방을 알아가는 방법이 조금씩 바뀌는 것 같다. 어린 시절에는 궁금증을 참지 못해 늘 바로 바로 상대방으로부터 답을 듣길 원했고, 관계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싶어했다. 그리고 상대방의 행동 하나 하나에 반응하고 의미를 부여하며 판단했다. 그리고 내가 내린 생각의 틀에 그 사람을 끼워넣곤 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사람들을 많이 겪어낼 수록 그런 열정이나 조급함은 사라지게 되었다.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을 땐, 그저 시간을 두고 지켜보며 상대방이 하는 행동, 대화, 태도 사이의 행간을 읽어내기 위한 노력을 하게 된 것이다. 여기에는 어느 정도 인내심이 필요하다.
어느 관계든 열정적으로 다가가지 못한다는 것, 좋은 것일까? 나이가 들수록 예전에 쉬웠던 것들이 더 어려워지고 어려웠던 것들은 쉬워진다. 어릴 땐 아무 생각없이 있는 그대로 상대방을 받아들였던 것 같은데, 이젠 누군가와 '관계'를 맺는 일이 이중 삼중 필터를 거치게 된다. 주말의 만남을 상상해보며 나는 잊고 있었던 사람에 대한 순수한 마음을 더듬 더듬거리며 떠올려 본다. 그는 어떤 우주를 갖고 있는 사람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