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도 그들만의 삶이 있다

모두 처음 해보는 것들이니까

by Lagom




작년 '부부의 세계'라는 드라마가 굉장히 핫했다. 한국 드라마를 잘 보진 않지만 하도 주위에서 재밌다고 해서 나도 1화를 슬금슬금 보기 시작하다 결국 마지막화까지 다 보고 말았다. 특히 쇼파에 누워 심드렁하게 드라마를 보다 이태오가 '사랑에 빠진게 죄는 아니잖아!' 하고 와이프에게 외치는 장면에서 나는 몸을 벌떡 일으켜 '이 무슨 개xx....' 라는 말을 뱉었다. 젊은 여자와 사랑에 빠진 남편이자 한 아이의 아빠인 태오. 그래, 모든 인간은 자유의지가 있으니 사랑에 빠진건 죄가 아니다. 하지만 평생 당신만을 사랑하겠다는 맹세를 지키지 못한 것은 분명 잘못된 선택이다. 그 드라마를 보며 나는 다시 한번 깨달았다. 사랑에 빠지기란 얼마나 쉬운지, 이에 반해 진정으로 한 사람을 사랑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말이다.



드라마를 보다보면 태오와 선우의 아들 준영이 부모의 이혼으로 인해 상처받고 엇나가는 모습이 나온다. 그 또래의 아이들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와 오랜 친구인 정희가 그랬다. 그녀의 아버지는 유머감각도 뛰어나시고 외모도 꽤 호감형이셨다. 음주가무에 능하신 분이라 늘 흥이 넘치셨는데 문제는 집 밖에서만 그러셨다는거다. 자식 교육에 대해서도 크게 관심없으신 듯 했다. 한 번은 우리가 초등학생일 때 아버님이 지방 출장 가시는 길에 우리를 태워주겠다고 하셔서 정희 아버지 차 뒷좌석에 탄 적이 있다. 차에 타자마자 아버님은 친구분과 통화를 하며 운전을 하셨다. 걸쭉한 사투리 대화가 얼마쯤 오갔을 까, 초등학교 저학년이었던 우리 눈에 비친 창 밖의 모습은 어느덧 고속도로에 진입하고 있었다. 사태가 심상치 않다는걸 직감한 나는 정희를 바라보았고 그녀는 뒷좌석에서 '아빠!'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 때 백미러로 우리를 보며 당황하시던 정희 아버님 표정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결국 우린 그날 결석했다. 나는 이게 꽤 즐거운 에피소드라고 생각했지만 정희는 그 때 아버지에게 굉장히 실망한 눈치였다.



정희의 어머니는 굉장히 이성적이시고 자기관리가 철저하신 분이었다. 그러니 술과 친구를 자제하지 못하고 흥에 취해 사는 아버지가 좋게 보일리 없었다. 늘 술에 만취해 귀가하시는 정희 아버님을 수발하는건 어머님 몫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정희는 눈이 퉁퉁 부은 채로 우리집에 찾아왔다. 이유인즉슨, 아버님이 바람을 피우고 계셨는데 그게 발각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설상가상 태어난 아이도 있다고 했다. 막장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가 이렇게 가까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니. 우는 그녀를 나는 밤새 달래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당연히 정희 어머니와 아버지는 이혼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게 맞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정희 생각은 좀 달랐다. 그 때만 해도 지금처럼 이혼이 흔한 일이 아니었고, 이혼가정이란 딱지는 일종의 '주황글씨' 같은 역할을 했다. 정희는 어머니에게 '나도 아빠가 밉지만 제발 이혼은 하지 말아달라'고 울며 빌었다고 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정희는 그 때 당장 '이혼하시라'고 말하지 않은 자기가 너무 후회스럽다고 왕왕 말한다. 사람은 안 변한다는 것을 그땐 몰랐으니까.



정희 어머니의 마음에도 잊지 못할 상처가 새겨졌다. 바람 핀건 남잔데, 되려 시댁에선 '너가 얼마나 바가지를 긁었으면... ' 하는 핀잔이 날아오기 일쑤였다. 하지만 정희와 동생을 생각해 가정을 어떻게든 지켜야겠다고 생각하신 것 같았다. 쓰나미가 지나간 정희의 집안 분위기는 좋을리가 없었다. 그 사건 이후 정희는 아버지를 원망하고 또 원망했다. 그러던 그녀의 태도가 바뀐 일이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우리가 고3 수험생이 되었을 때였다. 함께 정희집에서 벼락치기 공부를 하며 라디오를 듣고 있었다. 그 때 들려오던 사연이 바로 '아버지가 바람을 피고 집안 행사는 뒷전이며 매일 골프나 치고 다닌다, 너무 화가 난다'는 내용이었다. 우리는 바쁘게 움직이던 펜을 내려놓고 귀를 기울였다. DJ는 사연을 다 읽고 난 후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

'부모님도 부모 처음 해보는 거잖아요. 그냥 아버지는 아버지대로 삶이 있다고 생각하세요. 왜 아버지는 그렇게 사시냐고 원망할수록 본인만 힘들어집니다. 부모님들도 부모이기 이전에 평범한 사람입니다. 사연자분도 사연자의 삶에 더 집중해보세요'


그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정희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무언가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그 이후 그녀는 더 이상 아버지의 삶에 관여하지 않았다. 자신이 삶에 더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아버지와 의절한 건 아니었다. 어버이날, 생신 때마다 꼬박 꼬박 선물은 챙겨드렸다. 자기가 원해서 아버지 자식이 된 건 아니지만, 자식으로서 해야 할 도리는 해야 한다는 마음으로. 그녀에겐 그것이 인생의 깊은 밤에서 깨어나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었다.



시간이 흘러 그 시절 부모님의 나이가 되고 보니 이제 어렴풋이 알겠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모두가 '성숙한 인간'이 되는 건 아니라는 것, 부모라고 해서 다 완벽하지 않다는 것, 그리고 부모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말이다.

구구절절 글이 길었지만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이렇다. 부부의 세계의 태오 아들 준영처럼 엄마 아빠의 이혼으로 자신의 삶을 헝클어버리는 짓은 아무도 하지 말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발전시킬 수도 있고 망가뜨릴 수도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우리 손에 달려있다. 어떤 관계 속에서 내 자신을 찾기보단 스스로의 나를 찾아야 한다. 나는 이 땅 위에 모든 것들은 저마다의 뜻이 있다고 믿는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새로운 만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