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시작은 이별에서부터 출발한다

타임 투 세이 굿바이-

by Lagom

모든 시작은 이별에서부터 출발한다



나는 그를 잠실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얼굴을 본 횟수로 따지면 이것이 세번째였다. 처음은 편의점에서 그가 내게 커피를 쏟은 날이었고 두번째는 식당에서 그가 내게 물을 쏟은 날이었다. 연거푸 내 옷을 더럽힌게 미안했는지 그는 꼭 차 한잔을 사고 싶다고 했고, 그렇게 연락을 주고받아 다시 만나게 되었다. 편의점에서 그가 내게 커피를 쏟은 날은 내가 전남친의 물건을 전해주러 나간 자리였다. 그래서 사실 나는 이 남자와의 첫 기억이 유쾌하진 않다. 허나 두번이나 나에게 '무언가'를 쏟고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모습이 어쩐지 마음에 들었다. 세상엔 잘못을 하고도 미안해하지 않는 사람이 너무나 많.으.니.까 말이다.


카페에 도착하니 그가 먼저 와있었다. 그는 나를 보자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지런한 그의 치아가 눈에 띄었다.

"안녕하세요, 정민씨 조승혁입니다" 활기찬 목소리였지만 무언가 묵직함도 느껴졌다.

"네 안녕하세요 박정민입니다" 나는 내 소개를 했다.

"뭐 드시겠어요?" 그가 말했다.

"어.. 뭐 드시겠어요?" 나는 그의 말을 되풀이했다. 왠지 뭐 먹겠냐는 질문을 한 사람이 돈을 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건 내가 빚 지고는 못 사는 성격 때문일지도 모른다.

"아 저는 아이스아메리카노요. 같은걸로 드시겠어요?" 나의 대답을 그는 내가 메뉴고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한 것 같았다.

"아 네 그럴게요" 내가 말했다. 그러면서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 일어나려고 했다. 나의 미묘한 꿈틀거림을 눈치챘는지 그가 웃으며 말했다.

"이건 제가 사겠습니다. 세탁비도 못 드렸는데, 이건 제가 사게 해주세요"

"아...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커피 한잔을 얻어 먹었다.



주문한 커피를 들고 그가 자리로 돌아왔다. 그제서야 그의 얼굴을 나는 제대로 볼 수 있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갈색 머리, 가지런히 정리된 눈썹이 눈에 들어왔다. 쌍커풀이 없는 눈이었지만 작은 눈은 아니었다. 하나 하나 뜯어보면 조각같은 미남은 아니었지만 이목구비가 꽤 조화로운 얼굴이었다. 특히 그가 웃을 때 보이는 가지런한 치아는 상대방에게 왠지 모를 '믿음'을 주는 것 같았다. 그는 키는 크진 않았지만 어깨는 넓은 편이었고 목은 길고 가늘었다. 운동을 좋아하는 듯한 다부진 체격이었다. 불필요한 살은 없어보였고 구김없는 네이비 맨투맨에 야상 자켓을 입고 있었다. 대체로 호감형이었으나 내가 이성적 매력을 느낄 만한 부분은 없었다.


우리는 간단한 안부로 담소를 이어갔다. 그는 말솜씨가 좋았고 호감형이었으며 화제도 다양했다. 내가 머뭇거리는 이야기라면 재빠르게 다른 이야기로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대체로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스타일인 것 같았다. 그는 영상 편집을 하고 내가 다니는 회사 근처에 직장이 있다고 했다.

"회사 일은 재밌으세요?" 내가 물었다. "회사 일이란게 재미가 있긴 어렵긴 하지만..."

"뭐, 즐거운 것 같아요" 그가 웃으면서 말했다. "아시다시피 재미란 찾기 나름 아닐까요. 이 회사를 다니다보니 이렇게 정민씨도 다시 만나게 되었구요. 이런게 재미죠"

툭툭 던지는 그의 말이 예전엔 설레임으로 다가왔겠지만 지금은 그렇지가 않았다. 아 낡디 낡은 이 감정 세포들이여.

"그렇군요" 내가 담담하게 대답했다.

나의 반응이 예상 밖이었는지 그는 잠시 당황한 것 같았다. 약간의 침묵이 생겼다. 나는 빨대로 아이스아메리카노의 얼음을 휘휘 저으며 창 밖을 응시했다. 그 때 카페에서 Duke Jordan의 Everything Happnes to Me가 흘러나왔다.


"어! " 그가 침묵을 깨는 소리를 냈다.

"이 노래 아세요?" 내가 흥미롭게 물었다.

"네, 좋아하는 노래 중 하나에요. 챗베이커 버전도 좋아합니다" 드디어 침묵을 깼다는 안도감의 목소리로 그가 대답했다.

"저도 좋아해요. 본투비블루 영화 보셨어요?"

"오! 네, 저 에단 호크 엄청 팬이거든요. 가타카 이후로 죽- 이요" 그가 내 쪽으로 몸을 당겨 앉으며 대답했다.

그렇게 우리는 서먹했던 시간을 뒤로 하고 챗베이커와 마일즈 데이비스, 에단 호크의 연대기를 이야기에 푹 빠졌다. 실로 오랜만에 누군가와 이렇게 '일'이나 '돈', '미래 고민'을 제외한 화젯거리로 이야기 해 본게 얼마만인지. 낯선 이에게 가졌던 경계심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외모로는 이성적 끌림은 없었으나 대화를 하며 나는 그의 매력을 알게 되었다. 그는 굉장히 흡인력 있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이렇게 두 눈이 반짝이다니. 순수한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이 무심코 들었다. 두 눈이 반짝인다고 해서 순수하다는 인과관계는 어디에도 없지만 말이다.




에단 호크에 대한 이야기를 이어가며 우리는 '죽은 시인의 사회'와 '가타카' 그리고 '비포선라이즈'에서 그가 리즈 시절이었다는 데에 의견이 같았다. 그러나 비포 선라이즈 같은 사랑이 가능할까에 대한 부분에 대해선 의견이 달랐다. 그는 충분히 가능하다고 했고 나는 불가능하다고 대답했다.

"세상에 미심쩍은 부분이 많으시군요" 그가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모든 관계엔 유통기한이 있거든요. 친구, 직장상사, 심지어 가족사이에서도 말이죠. 사랑에도 유통기한이 있지만 사람들은 믿고 싶어 하지 않아하죠" 무미건조하게 내가 대답했다.

"그럼 우리의 인간관계 유통기한은 언제까지인지 알아봐야겠네요" 그가 대답했다.

적절하게 받아칠 농이 생각나지 않아 나는 웃음으로 대신했다.


아마 오늘 지나고 며칠? 정도가 끝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속으로 품으며 말이다.

하지만 그런 내 생각이 얼마나 단순했는지 그와 헤어지는 순간에 나는 깨달았다. 왜냐하면 그와 나누었던 대화에서 느꼈던 굉장한 흡인력ㅡ사람을 끌어당기는 힘ㅡ을 누군가로부터 쉽게 받기 어렵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성적 감정을 뛰어넘은 것이었다. 생각을 공유하고 공감하고 나눌 수 있는 인간 관계를 우리는 살면서 몇이나 만들어 갈 수 있을까.



카페에서 두세시간이 훌쩍 흘렀다. 그는 날도 좋으니 일정이 없으면 산책을 하는게 어떻겠냐고 말했다. 커피만 마시고 집으로 돌아갈 요량이었던 나는 망설임 없이 오케이를 했다.

카페 문을 나서며 생각했다. 이 관계가 오늘 하루로 끝이 나든 오랜 우정으로 이어지든 그것과 무관하게, 내가 새로운 누군가와 관계를 시작했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말이다. 인생에는 단계가 있다. 그러니까 새로운 시작을 하려면 이별에게 씩씩하게 세이굿바이를 외쳐야만 가능한 것이었다. 10년을 만나고 헤어진 전남친이 나에게 물건을 되돌려 달라고 문자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편의점에 나갈 일도 없었고 이 남자가 커피를 내게 쏟을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지금 이 사람과 유쾌한 대화를 이어가지도 못했으리라. 문득 헤르만 헤세가 한 말이 떠올랐다.

'모든 시작에는 마법이 깃들어 있어'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