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생각 창고

말은 제주로, 사람은 서울로

나의 첫 서울

by Lagom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가수 조용필씨의 '서울 서울 서울' 이라는 노래가 있다. LP를 좋아하셨던 어머니가 늘 이 노래를 틀어놓곤 하셨다. 학창시절 이 노래가 왜 그렇게 아련하고 낭만적으로 들렸던지. 지방에 사는 나에게 '서울'이라는 도시에 대한 동경을 더욱 심어주었다. 내가 나고 자란 곳은 면사무소가 있고 이장님이 있는 그런 시골이었다. 작은 시골 마을에 이제 막 아파트가 하나둘씩 생겨나던 시절 부모님과 나 그리고 동생 이렇게 넷은 부산에서 울산으로 옮겨왔다. 사람들은 '울산'이라고 하면 다들 '잘사는 동네잖아, 부자동네' 또는 '느그 아버지 현대 다니시노?' 하는 질문들을 한다. 하지만 우리 집은 이 질문에 모두 해당하지 않았다. 그 당시 잘사는 동네는 일부 동네였고 아버지는 평범한 중소기업 건설사를 다니셨다.


걸어서 3-40여분이면 동네 전체를 다 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작았던 곳. 아파트 밖 풍경은 온통 논밭이었고 초등학교 가는 길은 논두렁을 통과해서 걸어다니는 시골길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집 현관에서 책가방을 거실로 휭~ 던져놓고 친구들과 함께 강가에 놀러갔다. 지금 생각하면 그런 시절이 나의 섬세하고 다양한 감정을 만들어낸 것 같다. 하지만 그 땐, 그 시골에서 그렇게 벗어나고 싶더랬다.



남대문 시장에서 물건을 떼오셨던 어머니를 따라 가끔 서울행 무궁화호 기차를 타고 갈때면 그 어린 나이에도 그렇게 설렐 수가 없었다. 고향에서는 볼 수 없었던 군중의 모습,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며 왠지 그 바쁨이 바로 성공한 사람들의 모습인 것 같았다.



'그래, 성공하려면 서울로 가야해'


언젠가부터 이런 생각에 사로잡혀 내가 생각한 성공한 삶의 첫 단계는 '서울에 있는 대학가기' 로 구체화되었다. 그러려면 공부를 잘해야 했다. 다행인지 모르겠지만 공부하는게 그리 싫진 않았다. 좋은 성적을 받아오면 삶의 무게에 짓눌려 혈색을 잃어가던 어머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고등학교까지 공부도 곧잘하고 전교등수 안에 있었던 나였기에(자랑은 아닙니다) 서울에 있는 소위 SKY(서울대 고대 연대), 서성한(서강대, 성균관대, 한양대)는 무난히 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시험으로 인생의 방향이 달라지는 '수능날' 나의 꿈은 와르르 무너졌다.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탓인지 2교시 수리시험 이후 급격히 집중력이 떨어졌다. 시험이 끝나고 시험장 앞에서 기다리던 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오며 한마디도 하지 않았던 기억이 난다. 조바심으로 내 눈치를 보며, 물어보고 싶은 말이 한가득이지만 꾹꾹 삼키는 어머니의 얼굴을 모른척 한 채 집으로 돌아왔다.


혼자 가채점을 시작했다. 예상대로였다. 완전히 망했다. 온전히 나의 실수 때문이었는데, 어머니는 그 흔한 입시학원을 보내주지 못해서 그렇게 된 것 같다고 미안해하셨다. 다른 집 누구는 성적이 바닥이었는데 입시캠프를 다녀와서 연고대를 갔다더라, 하는 말도 덧붙이시면서. 한 때는 나도 그런 원망 아닌 원망을 살짝 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가난이라는 것은 부모님의 잘못도, 내 잘못도 그 누구의 책임도 아니었다. 모든 게 지나간 지금 생각해보면 그 때 시험을 망쳐버린건 그냥 내 운명이었던 것 같다. 어찌됐든 수능은 망쳤지만 그 덕에 다른 경험들을 더 해볼 수 있었으니까. 내 인생이지만 내 뜻대로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계기가 되기도 했다.


수능 결과로 이 곳 저 곳 원서를 쓰기 시작했다. 지방 국립대 괜찮은 곳을 갈 수 있었고 서울에도 중하위권 몇 군데는 갈 수 있었다. 어머니는 지방 국립대를 가길 원하셨다. 넉넉치 않은 형편이었기에 학비나 기타 생활비가 서울보단 많이 아낄 수 있었고 내심 내가 공무원이나 교사같은 안정된 직장을 갖길 원하셨다. 하지만 나는 곧죽어도 '사람은 서울로, 말은 제주로' 라는 고집을 꺾지 않았다. 학비는 내가 장학금으로 해결하고, 생활비는 아르바이트를 해서 어떻게든 충당하겠노라고 선전포고했다. 그렇게 나는 서울로 향했다. 나만 열심히 살면 그깟 대학 정도야 뭐, 아무런 걸림돌도 되지 않지 ㅡ 하는 당찬 포부를 안고서.

서울에는 내가 맛보고 싶었던 '성공' 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어떤 맛인진 모르겠지만 아마도 짜릿하고 화려한 맛이리라. 걱정스런 어머니의 얼굴을 뒤로 하고, 지긋지긋한 이 시골을 벗어날 수 있다는 부푼 기대감을 안고 나는 서울로 상경했다.



그 땐 왜 몰랐을까. 멀리서 보았기에 서울이 아름다워 보였다는 사실을. 인생은 멀리서 보면 희극이고 가까이에서 보면 비극이라는 말처럼 말이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든 다 똑같다는 걸 그 땐 알지 못했다.


조용필, 서울 서울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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