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자의 한계
내 이름은 박정민.
남자 이름 같지만 여자다. 딸이 독립적인 자아로 크길 원했던 엄마가 중성적인 이름을 지어주셨다. 이름 덕분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꽤 독립적인 사람이 되었다(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어릴 때부터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이 늘 분명했다. 어떤 면에서는 장점이 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단점이 되기도 한다. 이런 성격 때문에 주위에선 나를 두고 '까칠하다'는 표현을 종종 썼다. 두리뭉실한 느낌으론, '편하지 않은 성격'이라는 의미 정도가 될테지. 예전에 이 단어의 정확한 뜻을 알고 싶어 사전을 찾아 본 적이 있다
까칠-하다
야위거나 메말라 살갗이나 털이 윤기가 없고 조금 거칠다.
마른 편이긴 하니 까칠하다는게 꼭 틀린말은 아니겠구나 싶었다. 크게 기분 나쁜 말은 아니었다. 꼭 편한 성격이어야만 하는건 아니지 않나. 아이러니하지만 이런 나도 '사랑'이라는 걸 한다. 아, 이젠 과거형이 되겠다.
오늘 그 남자와 헤어졌다.
나의 20대를 바쳤던 사람. 당연히 우리 만남의 끝은 결혼일거라고 믿었던 순진했던 내 시절이 오늘 끝났다.
우리가 함께 보낸 10년이란 시간은 크게 유난스럽지도, 애틋하지도 않은 시간이었다. 하지만 늘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였다. 책을 좋아했던 우리는 만나서 한 마디도 하지 않고 몇 시간을 서로 책만 본적도 있었고, 각자 보고 싶은 영화를 다른 상영관에서 보다가 영화가 마친 후에야 만난 적도 있었다. 서로를 독립적인 존재로 이해하는 사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데면데면한 커플이었던 건 아니다. 시간이 쌓인만큼 서로에 대해 모르는 것도 없었다.
어떤 옷을 좋아하는지, 어떤 음악을 듣는지, 어떤 음식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지금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입모양을 움직이는지 심지어 어느 시점에 화장실을 갈 것만 같은지까지도.
이런 익숙함과 편안함이 관계를 오래 지속하는 힘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친구를 만나고 오늘 늦게 집에 들어갈 것 같다, 고 말하면 나는 그러려니 했다. 그 뒤로 다음날까지 연락이 없어도 크게 신경쓰이지 않았다. 나도 친구들과 만날 땐 연락을 하지 않는 편이기도 했고. 그러나 우리 관계를 지탱해주는 익숙함, 편안함, 믿음이 오히려 관계를 망치고 있었던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결혼한 친구들이 우스갯소리로 했던 말이 있다.
'남자에게 가장 설레는 여자는 어떤 여자인줄 알아?'
'글쎄, 첫사랑?'
'낯.선.여.자. 처음 본 여자'
' 그럴 듯 하네(웃음)'
그 땐 그렇게 웃음으로 흘려 들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익숙함이 독이었을까? 그렇다고 늘 익숙하지 않은 불편한 상태가 되어야 하나? 사람은 같이 지내면 언젠간 익숙해질텐데? 머리가 복잡해졌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란 것은 마치 죽기 쉬운 화분과 같았다. 주기적으로 물도 주고, 햇볓도 쬐어 주고 해충이 들지 않도록 신경써주어야 하는 그런 화분. 제때 관심을 가져 주지 않으면 죽어버리는 화분처럼 사람과 사람 사이도 노력을 하지 않으면 죽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죽은 화분을 버리고 '새로운 화분'을 찾아 떠난걸까. 헤어질 때 마지막 말은 단순했다.
'정민, 널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이보다 명확한 말이 어디 있을까.
덤덤하게 그의 말을 들으며 나는 그렇구나. 잘 알겠어. 잘 지내라는 말을 내뱉고 돌아섰다.
사실 그와의 이별을 상상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상상했을 땐, 크게 허전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사람은 만났다 헤어지는 존재들이고, 김윤아의 '봄날은 간다'처럼 피고 지는 꽃 같은게 사람의 마음이니까. 하지만 막상 상상만 했던 상황이 닥치고 보니, 뭐랄까 - 매우 당황스럽다. 이 사람 이전에도 연애를 했고, 헤어짐을 겪었는데 왜인지 마음의 구멍이 생각보다 크게 느껴진다.
하지만 마음 속 구멍은 시간이 지나면 다시 무엇으로든 채워질테다.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는데, 내가 뭘 어쩌겠는가. 붙잡는다고 돌아설 마음이었다면 쉽사리 접을 생각도 안했겠지.
오늘은 철저히 혼자이고 싶다.
불 꺼진 자취방에 들어와 대충 옷을 갈아입고 매트리스 위에 새우자세로 웅크려 누웠다.
어둠 속에서 손을 더듬으며 휴대폰을 찾아 에피톤 프로젝트의 '나는 그 사람이 아프다'를 틀었다.
한껏 울고 나면 헛헛한 마음도 조금은 달래질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 않는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내가 그를 더 사랑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인걸까.
함께한 시간이 '사랑'이긴 한걸까.
우리는 왜 헤어졌을까.
....
아마 나는 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좋아함엔 이유가 많지만 사실 헤어짐엔 이유가 없다.
그냥 각자의 한계에 다다랐을 뿐.
서로에 대한 마음이 다했을 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다.
오늘까지만 지난 인연을 곱씹어보기로 하자 - 고 다짐한다.
10년의 기억을 애도하는 시간 정도는 최소한 가져야지.
그녀는 시뻘개진 눈에서 곧 터져 나올 것 같은 눈물을 참느라 온 힘을 다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