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많이 사랑할까봐 두려워하지 말아
어제 이별한 사람 치곤 덤덤하다. 똑같은 하루가 시작되었고, 어제와 다를 것 없이 오늘도 출근을 하고 있다. 세상은 나의 슬픔이나 상실과는 상관없이 잘만 굴러간다.
지하철이 들어온다는 안내방송이 들리면서 동시에 저 깊은 굴에서 거대한 뱀 한마리가 미끄러지듯 지하철이 플랫폼으로 들어온다. 지하철을 볼 때마다 나는 꼭 큰 뱀 같다는 생각을 한다. 그 뱀은 역마다 매번 많은 사람들을 토해내고 또 많은 사람들을 삼켰다. 그 과정을 매 역마다 되풀이한다.
지하철은 오늘도 만원이다. 출퇴근 시간에 이 지하철에 몸을 맡긴지도 벌써 10년. 처음엔 내 다리로 서 있는 건지, 다른 사람들이 만들어놓은 틈에 껴서 가는건지 분간이 안될 때가 있어 당황스러웠지만 이젠 그러려니 한다.
콩나물 시루라는 표현이 딱 맞다. 다들 머리만 삐죽 삐죽 나와있고 몸은 다닥다닥 붙어있다.
2000년 초반만 해도 지하철에는 무간지가 늘 있었다. 사람들은 무간지를 접어서 보거나, 책을 읽거나 하며 무료한 시간을 보냈었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 스마트폰에 두 눈을 고정하고 바쁘게 엄지손가락만 움직이며 시간을 흘려보낸다. 뭐 재밌는게 있나, 하고 흘깃 주위 사람들 폰을 보지만 딱히 재미난 건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음악을 틀고 눈을 감았다. IT회사에 일하면서 너무 많은 시간을 IT기기와 함께하다보니 오히려 뇌의 근육은 퇴화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출퇴근시간 그리고 집에 돌아와 잠들기까지 몇 시간은 그것들과 멀리 하기로 내 스스로 다짐했다. 화면 위로 쏟아지는 무수히 많은 텍스트, 이미지들이 나를 점점 압도하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이런 몇 시간의 '디지털디톡스' 시간 덕분에 뇌의 근육이 조금씩 단련되는 것 같기도 하다.
내려야 하는 역에 도착할때쯤 다들 조금씩 분주해진다. 문앞에 있는 사람은 뒤쪽에 사람들이 나갈 수 있게 내려줘야 하고, 어중간하게 중간쯤 위치해 있는 사람은 빠르게 문 쪽으로 자리를 잡아나가야 한다. 그래야 30초 가량 열리는 문을 뚫고 내릴 수 있다. 나는 옆으로 맨 가방끈을 몸 앞으로 당겼다. 전쟁터에서 방패를 들고 적진을 뚫고 나가는 전사처럼 밀고 나가야 한다. 사람들이 가장 많이 타고 내리는 환승역, 고속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사람들이 썰물처럼 밀려나간다. 나도 그 흐름에 맡겨 무사히 지하철에서 내렸다.
사무실에 도착하기도 전인데, 벌써 지쳐버렸다. 심호흡을 크게 한 번 하고 개찰구로 나선다. 오늘도 하늘이 참 맑다. 무지하게 덥다 싶더니 벌써 가을이 오려는 건지 코끝을 스치는 공기의 무게가 다르다. 어제의 이별은 어제로 끝내고, 오늘은 또 새로운 오늘을 살아야지. 하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다들 일할 준비를 하느라 분주하다. 옆 자리 깔끔한 김과장은 책상을 물티슈로 닦고 있고 요즘 다이어트를 한다던 이대리는 물 2리터를 준비하고 유산균을 먹고 있다. 아, 나는 프로그래머다. 어떤게 좋고 싫으냐 하는 질문보다 어떤게 맞고 틀리냐 하는 질문을 더 선호한다.
내 책상은 언제 회사를 나가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짐이 별로 없다. 업무에 필요한 컴퓨터와 모니터, 키보드, 헤드셋 그리고 기타 세안용품들. 무엇이든지 군더더기 없는 것이 좋다. 책상도, 사람도 그리고 삶도.
내 얼굴이 어제보단 좀 부어보였는지 책상을 닦던 김과장은 나를 쓱 보더니 묻는다.
"어제 잠 잘 못잤어? "
" 아, 좀 뒤척였나봐"
"남자친구는, 어떻게 됐어?"
"헤어졌어"
약간의 침묵이 흘렀다. 김과장은 나의 헤어짐을 예측했던 것 마냥 쿨하게 대답했다.
"우리 박과장 FA시장에 나왔네? 좋은 곳으로 내가 또 알아보지~"
나는 피식 하는 웃음으로 답했다. 그녀는 나와 입사 동기다. 내가 입사할때쯤 만난 남자친구였으니 그녀는 나의 역사를 대략은 알고 있다. 꼭 거창하게 위로하지 않는 것이 때로는 더 큰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이라고나 할까. 우리 아빠가 수술실에 있을 때도 그녀는 한달음에 달려와주곤 '정민이 이젠 아빠 잔소리 며칠 간 안들어도 되겠다!' 라며 날 안아주었다. 츤데레 같은 스타일이었다.
오전 업무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었다. 오늘 점심은 나의 오랜 친구 중 하나인 정희와 함께하기로 했다. 내가 아는 사람 중 가장 밝은 친구다. 정희는 우리 사무실 근처에서 꽃집을 한다. 어릴 때부터 꽃과 식물을 그렇게 좋아하더니 커서도 식물에 둘러싸여 지낸다.
만나기로 한 카레집에 들어서자 그녀가 이미 자리에 앉아있다. 환한 미소로, 두손을 높이 흔들며 나를 반긴다.
"정민, 뭐먹을까? 오늘은 뭐가 먹고 싶어?"
"난 늘 먹던대로. 가라아게카레."
"으이~ 닭쟁이. 맨날 닭고기야"
하나에 빠지면 쉽게 잘 바꾸지 않는 나는 먹는거나 마시는거, 입는거 모두 하나에 꽂히면 질릴 때까지 그것만 먹고 마시는 편이다. 단, 사람은 빼고.
"난 그럼 오늘 새로운 메뉴를 먹어봐야지!"
야심차게 메뉴를 고른 그녀는 두 눈을 반짝이며 나를 바라본다.
"너 헤어졌구나"
세월이 무섭다. 눈빛만 봐도 나를 알아버리는 그녀.
"응 그렇게 됐어"
"잘됐어. 너가 백배 아까웠어. 좋은 사람은 또 있어! "
"글쎼... 만날 수 있으려나. 뭐 꼭 안만나도 괜찮아"
"사랑은 여러 번 할 수록 좋아.
사람은 두 번 세 번 사랑할수록 더욱 성숙해진다구.
헤픈게 아니야. 순정이 꼭 항상 정답은 아니란 말씀! "
씩씩한 그녀는 나에게 씩씩함을 선물해주고 싶어했다.
언제나 애정이 넘치는 그녀는 열렬히 한 남자와 사랑을 하고 헤어져도, 또 누군가를 만나 열렬히 사랑했다.
"정희, 너는 어떻게 항상 새로운 사람을 열렬히 사랑하는거야? 궁금하다 "
그녀는 씩 웃으며 답했다.
"애정도 돈과 같아. 내 안에 가득 쌓여야 쓸 수 있어. 누군가를 사랑하지 않는 동안 차곡차곡 나에 대한 사랑을 쌓아서 사랑할 상대가 생기면 그 때 꺼내는거지. "
"난 돈도 애정도 잘 안쌓이나봐 (웃음) "
그런 나를 그녀가 물끄러미 보며 대답했다.
"정민아, 내가 더 많이 사랑할까봐 두려워하지마. 내가 더 많이 사랑하면 또 뭐 어때. 상처, 좀 받으면 뭐 어때? 상처는 언젠간 아물게 되는걸. 온 마음을 던져서 사랑하면 그 사랑이 끝나고 난 뒤엔 후회가 남지 않아"
그랬다. 10년을 알았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남'이 되었는데, 엄청난 상실감은 들지 않는다. 나는 꽤 쿨하게 우리 사이가 정리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나는 견디기 힘든 상실감을 맞이하고 싶지 않아서 사람과의 관계에 더욱 깊이 빠지지 않는 것이었다. 잠깐 발을 담그면 발을 빼는 것도 쉬우니까.
"카레 나왔습니다"
정희의 이야기에 생각이 많아진 내 앞으로 음식이
나왔다.
"와~ 맛있겠다! 먹자! 먹고, 기운내고,
또 새로운 사랑을 찾아 떠나는거야 "
그녀는 씽긋 웃으며 숟가락을 들었다.
'오늘 그 남자와 헤어졌다' 에서 이어집니다 https://brunch.co.kr/@chaechaelee/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