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이야기는 새로운 페이지에.
10월의 마지막주 금요일. 늘 금요일은 사무실이 조금 한산하다. 특히나 마지막날이면서 금요일이기까지 한 오늘은 더욱 조용하다. 텍사스 소떼처럼 밀려드는 업무와 피로로 정신없이 보낸 10월. 몸은 힘들었지만 일이 바쁜 덕분에 나는 내가 '이별'했다는 사실을 금새 잊어버렸다.
이럴 때보면 참 신기하다. 아무리 힘들고 죽을 것 같아도 세상은 나의 슬픔과 아무 상관없이 잘만 흘러간다. 그 흐름에 맡기고 어찌 어찌 지내다보면 나도 그 상처에서 조금씩 회복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순간은 지나가도록 약속되어 있고 지나간 모든 것들은 잊혀지기 마련이다. 죽을 것 같은 그 순간만 잘 버티고 나면 시간이 흐른 후 상처가 아문 흉터를 보고 '참, 그땐 그랬지' 하고 피식 웃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대부분의 연애를 '결말을 알고 보는 영화'처럼 했다. 영화 속 반전 결말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것보다 미리 결말을 알고 찬찬히 영화를 보면서 반전을 예상하는 것을 선호했다. 그래야 충격을 덜 받을테니까 말이다. 그래서 누구든 만남을 시작 할 때, '언젠간 헤어질 사람' 이라는 선을 그어두었다. 그러다보니 상대가 느끼는 나의 애정의 온도는 늘 한계가 있었다. 관계라는 것은 밑지지 않고 싶다는 것이 기본 출발선이기에 내가 그렇게 행동할수록 상대방도 뜨뜨미지근해져갔다. 미리 선을 긋고 시작한 만남이었기에 헤어짐의 후유증은 깊지도, 길지도 않았다.
아마 이 모든게 정희가 내게 한 말처럼, 내가 더 많이 사랑할까봐 두려워하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부모님의 이혼 후 혼자 남겨져 이곳 저곳 전전하며 사람에게 기대하지도 상처받지도 않는 방법을 터득한 탓인 것 같기도 하다.
어릴 때 생각에 잠겨있을 즈음, 카톡이 울린다.
정희다.
'결코 뒤를 돌아보지 말고 끊임없이 앞만 바라볼 것!'
전진형으로 살아가는 그녀가 좋아하는 말이다. 맞는 말이다. 뒤를 돌아본다는 것은 아무런 이익이 없다. 이미 저지른 실패를 주의하기 위해서 또는 받은 은혜에 감사하고 보답하기 위해서라는 몇가지 경우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고착화된 과거의 경험이 우리에게서 얼마나 많은 잠재력과 가능성 그리고 행복을 빼앗아 가는지 안다면 우린 까무러칠 것이다. 영원한 사랑, 변하지 않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염세적인 나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머리는 나도 알겠는데 사람은 마음이 주인이지라 쉽지가 않다. 경험에 근거해서 행동하고 판단하는걸 어떡하겠나. 다 그놈이 그놈, 거기서 거기.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기엔 사람이란 존재가 너무나 나약하다고 아직도 굳게 믿고 있는 나인걸 말이다.
퇴근 준비를 하며 사무실을 나서는 순간, 카톡이 하나 더 울린다. 왜 읽고 답을 하지 않냐고 채근하는 정희인가보다 하고 휴대폰을 보니 '그'였다. 한 달여만에 온 '그'의 카톡. 우리 집에 두고 간 그의 몇가지 짐들을 보내줄 수 있겠냐는 텍스트였다.
그 순간 눈앞에 댐이 차오르는 것처럼 눈물이 고였다.
아이러니하다. 정말 아무렇지 않았는데, 그가 있을 때와 없을 때 달라진거라곤 조금 더 많이 생긴 내 시간 뿐이었는데, 헤어진 직후에도 눈물 한번 나지 않을 정도로 괜찮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다.
위로를 바라고 관계를 바라는 것에 있어서 능숙하고 노련해지는 것을 습득하는데에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일까? 늦게 얻은 감정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자신을 진정시키고 그것에 대해서 이해를 하고 아 그래, 이런거야 하고 깨닫는 것까지. 도대체 얼마나 많이 겪어야 이런 것쯤은 스무스하게 넘어가지는 걸까. 그렇게 숱한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헤어짐을 반복했어도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에 얼마나 노련해지는가의 문제는 결코 시간과 비례하지 않는 모양이다.
나는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응 주말에 보낼게'
그와의 헤어짐은 일상적인 내 생활에 '비일상적'인 상황을 가져왔다. 이 '비일상성' 때문에 비교적 규칙적이었던 감정과 나의 행동이 미묘하게 조금씩 어긋나며 변해가고 있다. 아마도 그 어긋남이 다시 새로운 위치로 가기 위함이라고 나는 왠지 모를 기대감을 가졌다. 때론 그 어긋남이 나를 어떤 방향으로 데려다 줄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니까 말이다.
오늘은 미뤄두었던 옛 추억 정리를 해야할 것 같다. 강산이 변한다는 10년 동안 한 사람과 만나오면서 쌓은 시간이 남긴 부유물들이 집 곳곳에 꽤 있다. 그가 두고 간 몇가지 짐들과 많지는 않지만 주고 받았던 카드와 편지, 사진 등등의 흔적을 오늘은 정리해야겠다고 결심했다. 그 동안 물건 따윈 신경쓰지 않아- 하는 쿨한 척하는 마음 반, 바쁘다는 핑계 반으로 외면했던 것들을 말이다.
우리 인생은 책 한권과 비슷하다고 한다. 다음 페이지의 새로운 이야기를 채워나가려면 현재 페이지를 넘겨야 한다. 오늘 나는 그 페이지를 넘겼다. 어떤 이야기들이 쓰여질진 알 수 없으나 넘겼다는 사실에 혼자 꽤 뿌듯했다. 내 인생이 제대로 된 책 한 권이 될진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한 권이 되긴 하지 않을까?
먹먹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짐을 느끼며 오랜만에 일찍 퇴근길에 나선다.
브로콜리 너마저- 앵콜요청금지
아래 챕터에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