받은 사람만 기억하는 것

무의식 중에 우리 모두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고 있을지도.

by Lagom



연애와 물건의 동상이몽



토요일 아침.

나는 주말에도 일찍 일어나는 편이다. 7일 중 겨우 2일 쉬는데, 잠만 자면서 보내기엔 너무 아깝다는 생각이 든다. 할 일을 미리 다 끝내놔야 마음이 편한 성격인지라, 주말 아침도 늘 분주하다.오늘은 특히나 더 그렇다. '그'가 놓고간 짐을 처리해야 한다. 굳이 만날 필요는 없으니 택배를 이용하려고 했다. 그러나 어젯밤 '그'가 주말에 필요한 물건이 있어서 직접 가지러 오겠다는 메세지를 보냈다.

굳이..? 하는 생각이 들었으나 알겠다고, 집 근처 편의점 앞에서 보자고 짤막하게 답을 보냈다.

물건만 주고 바로 돌아올 수 있는 장소로 생각난 곳이 편의점이었다. 카페면 커피라도 마셔야 할 것 같고 이야기를 뭔가 더 해야할 것 같으니까 말이다.


오해하지말자. 정말 물건이 필요해서 오겠다고 하는거니까. 10년을 알고 지낸 '그'는 그렇게 감성적인 인간은 아니다.

신발장 앞에 놓아둔 박스가보인다. 박스 두개가 꽉 차고 나머지 하나는 반쯤 찼다. 대부분 그가 두고 간 책, 옷가지 등이다. 이걸 왜 굳이 받으려는거야? 그냥 버려도 될텐데. 박스를 차로 들고가며 나는 속으로 삐죽였다.


연애는 연애고, 물건은 물건이야.

헤어진 사람들이 주고받은 선물을 버리거나 처분하지 않는 것에 대해 그가 종종 말했던 이야기다.

그래, 물건은 물건. 사람은 사람이지. 하지만 물건을 보면 그것과 관련된 기억들이 속속 떠오르는데, 어떻게 그 둘을 명확하게 구분할 수 있어? 하고 내가 그에게 되받아치던 대화가 떠오른다. 그는 참 여러모로 이성적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차에 타고 보니 그제서야 눈에 들어오는 방향제. 내가 처음 차를 샀을 때 그가 사준 것이다. 이것도 버려야 하나? 잠시 고민하다 이내 두기로 했다.물건은 물건이니까. 그리고 지금 당장 대체할 수 있는게 없으니까 말이다.


편의점 앞에 차를 잠시 대고 그를 기다린다. 약속시간 5분 전. 아직 시간이 좀 있다. 편의점에서 음료수나 하나 사와야겠다는 생각으로 차에서 내렸다. 늘 먹는 것만 먹고, 가는 곳만 가는 전형적인 '루틴'한 인간인 나는 오늘도 어김없이 바나나 우유 하나를 집었다. 계산하려고 줄을 섰는데 앞에 선 남자의 계산이 꽤 오래 걸린다. 포인트를 사용하고 싶은데 어플 업데이트가 안되어 있는 모양이였다. 얼핏 계산대를 보니 소보루빵 몇개와 딸기우유 그리고 뚜껑이 닫히지 않은 먹다 남은 커피가 있었다. 큰 금액도 아닌데 그냥 계산하지... 하는 생각이 든다.


eduardo-soares-NRP0iTFLzPk-unsplash.jpg


후 - 드디어 끝났나보다.

그는 앞에서 나가려고 뒤를 돌고 나는 이 지루함을 얼른 끝내고 싶어 계산대 앞으로 몸을 들이밀었다.

그 순간, 탁 -

앞사람이 들고 있었던 커피가 내 앞으로 쏟아진다.

후드티 앞에 물감처럼 번진 커피가 내 운동화까지 적신다. 순간 짜증과 당황함이 확 치밀어올랐다.

계산의 기다림에 엉망이 옷이 더해져 내 표정은 짜증으로 일그러졌다. 어쩔줄 몰라하는 앞사람의 얼굴 뒤로 바닥에 쏟아진 커피를 닦아야 한다는 생각에 약간 화가 난듯한 아르바이트생의 얼굴이 보인다.


"죄송합니다 아 너무 죄송해요 어떡하죠"

거듭 죄송하다고 말하는 남자. 그러면서 바로 편의점 안에 있는 물티슈와 티슈를 가져와 계산한다.

그리고 나에게 건넨다.

"세탁비 물어드릴께요. 정말 죄송합니다. 계좌 알려주세요 "

"아..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세탁비는 문제가 아니었다. 곧 '그'가 올텐데 이런 꼴로 마지막 모습이 기억되야 한다니.

박스를 앞에 내려놓고 그냥 도망가버리고 싶었다. 어디 세탁기라도 있으면 들어가서 나를 헹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 아직 그가 도착하지 않았으니 얼른 차에서 박스를 내려놓고 아르바이트생에게 짐을 맡아달라고 해야겠다. 그런데 건네주는 물티슈와 휴지로 대충 옷을 닦고 나서려는 순간 편의점 밖에 '그'의 차가 보인다.

늦었구나. 이런 내 상황을 알 턱이 없는 '커피 쏟은 남자'는 연신 나에게 사과하며 세탁비를 주겠다고 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는 사이 '그'가 차에서 내려 나를 발견하고 뚜벅뚜벅 걸어온다.

드라마에나 나올법한 이런 통속적이고 진부한 상황이 나한테도 일어나다니.

이별한 여자가 전남친을 만나는 자리에서 몰골이 엉망인 상황. 이 얼마나 클리셰한 상황인가.


그는 문앞에 서서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며 나를 바라본다.

나는 얼른 이 곳을 벗어나고 싶었다. 황급히 나가려는 순간 이 눈치없는 '커피 쏟은 남자'는 나를 잡는다.

"아 이렇게 가시면 제가 너무 찜찜해서요 바쁘신것 같은데 일단 제 명함을 드릴테니 연락 주세요"

나는 "네" 하고 짧은 대답과 함께 명함을 홱 잡아챈 후 밖으로 나선다. '커피남'의 시선이 내 뒤통수에 꽂히는 것만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낭만적으로 채색되는 기억


나는 편의점 밖에 서 있는 그를 지나쳐 아무말 없이 차로 뚜벅 뚜벅 걸어가 박스를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

"생각보다 짐이 많지 않네"

박스를 받은 그가 뱉은 첫 마디였다. 박스를 들고 다시 내 옷과 신발을 응시한다.

"챙겨줘서 고마워. 여전히 덤벙거리네. 들어가서 얼른 옷 갈아 입어야겠다"


오장육부 깊은 곳에서부터 하고 싶은 이야기, 묻고 싶은 말들이 앞다투어 목구멍까지 차오르는걸 간신히 참고 겨우 내뱉은 한마디.

"응"

"음.. 그럼 이만 갈께. 함께 했던 시간들은 나에겐 다 좋은 추억이었어. 잘 지내"

자기 차로 돌아가 짐을 실은 그는 그렇게 떠나갔다.


이럴수가. 정말 내 머리를 쥐어뜯고 싶은 심정이다. 쿨하게 정말 쿨한 모습으로 당당하게 나타나고 싶었는데

그의 기억에 내 마지막 모습은 커피 얼룩으로 뒤덮인 '덤벙거리는 여자'로 남겨졌다.

차에 올라타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래, 이제 다 끝났는데 어떤 모습으로 기억되는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가 한 말이 순간 다시 떠올랐다.

'나에겐 다 좋은 추억이었어'


대부분 사람들은 자신이 누군가에게 준 것만 기억한다. 그도 나에게 주었던 사랑, 선물 등등 자신이 주었던 것들로 우리가 함께한 시간을 기억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나에게 준 상처는 기억이 나지 않는 모양이다. 아마 상처는 준 사람은 기억 못하고 받은 사람만 오랫동안 담아두기 때문인가보다. 나도 누군가에겐 그런 존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의도하진 않았으나 상처를 주고 나는 잊어버리고 지내는 것일 수도.

머리를 세차게 흔든다. 아무 소용 없다. 지나간 일은 이미 지나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기억하고 싶은것들만 기억하기 때문에 '기억'이라는 것의 태생은 흐릿할 수 밖에 없다. 오래되고 시간이 많이 흐를수록 기억은 낭만적으로 채색된다. 그와 나의 '이별시간'은 다르게 흘러가니, 그가 먼저 채색한 길을 따라 나도 언젠간 이 시간들을 '청춘의 사랑'으로 떠올릴 날이 반드시 찾아올거라고 생각한다.


살면서 깨달은 몇 가지 중 하나는, 인생은 단순한 균형의 문제라는 것이다. 좋은 일이 일어나면 반드시 그 다음에는 안 좋은 일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안 좋은 일이 연달아 일어났으니, 반드시, 좋은 일이 오겠지. 깊은 숨을 내쉬며 정희에게 전화를 건다. 곱창에 소주 한 잔 떙기는 날이다.




조원선 - 넌 쉽게 말했지만 (With 윤상)

https://youtu.be/kt1BiEN8bUY






아래 챕터에서 이어집니다.

01. 오늘 그 남자와 헤어졌다

02. 오늘도 어김없이 시작되고

03. 페이지를 넘겨요

keyword
작가의 이전글페이지를 넘겨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