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브랜드를 만드는 모든 과정
수능 날이 되면 괜스레 지난 풍파의 시간을 한 번씩 돌아보게 된다. 대부분의 수능 세대들이 그럴 것이다. 수능을 봤던 보지 않았던, 한 번 봤던 두 번 봤던 찬 바람이 쌩 불고 뉴스에 수능 며칠 전이라는 얘기가 들리면 꼭 그렇다.
나는 미대입시를 준비하며 수능을 두 번 봤는데, 첫 번째는 내 실력보다 잘 봤고 두 번째는 망했다 싶을 정도로 못봤다. 아이러니한 건 그렇게 수능을 잘 치른 첫 입시에서 원하는 대학에 다 떨어졌다는 것이다.
수능이 끝난 11월부터 2월까지 남들 다 놀 때 미대 입시를 준비하면서 당연 힘들었지만 불평 하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다. 아마 교생 선생님이 해주셨던 이야기인 것 같다. 꿈을 이렇게 일찍 찾은 걸 축복으로 생각하라고. 이렇게 지난한 과정을 누구나 한 번 쯤은 겪어야하는데 너희는 그걸 일찍 겪는 것 뿐이라고.
요즘엔 ‘어떤 직업을 갖고 싶다’가 아닌 ‘어떤 사람이 되고 싶다’고 꿈을 꾸라 한다. 달콤한 말이다. 대부분의 어른들이 학생들한테 이런 말을 할 때는 도덕적인 To be를 가져서 삐까번쩍한 Job을 꿈 꾸길 원한다. 그러니까 그냥 ‘의사’가 되라고 하면 열정이 없을 게 뻔하니, ‘사람을 살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꿈을 가져서 그 꿈을 연료 삼아 의사가 되길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학생들은 말한다. 그건 알겠는데, 나는 당장 어떤 과에 지원할 지가 고민이라고.
꿈. 학생 때 지겹도록 탐구했던 단어가 이제는 낯설다. 꿈이라는 단어를 들어면 세상에나, 하고 입을 틀어막고 싶어진다. 꿈이라는 말이 얼마나 덕지덕지 포장되어 있는지 알기 때문이다. 자꾸 찾으라고 하고, 꿈만 찾으면 온갖 열정을 다해 달려가 그것을 성취해내는 최후의 1인이 될 것 같은 그 느낌은 환상일 뿐이다. 이제와서 보니 꿈은 딱히 아름다울 것도 아니고, 애써 찾을 것도 아니고,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기에 미화될 것도 아니며 어떠한 직업도 아니고, 형체 없는 철학도 아닌 것 같다.
영화감독이 되고 싶은 내 친구 Y는 한 때 봉준호를 보며 밤마다 배가 아파 떼굴떼굴 굴렀다고 했다. 나는 그게 꿈의 실체인 것 같다. 욕심, 질투같은 것들. 종교에서는 죄악이라고 할만한 것들이 꿈의 민낯이지 않을까.
요즘 aat라는 나만의 브랜드를 만들고 있다. 만든다고는 말하지만 대체 뭐가 될지 나도 잘 모르겠다. 몇 시간 씩 컴퓨터를 보면서 뭔가를 조물딱 거리다가는 문득, '이거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 맞나?' 싶기도 하다. 오늘도 시안을 그리다가 내가 왜 사서 고생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진작 길을 찾았고, 그 방향으로 열심히 달렸는데도 아득하기만 하다. 그렇게 간절히 원했던 미대에 가게 되었고, 졸업해서도 꾸준히 원하는 디자인 일을 하고 있다. 내 디자인이 좋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있고, 내가 만들고 싶은 것들을 척척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래서 충분한가? 아니, 아직도 멀었다. 나보다 잘하는 사람들이 널렸고, 내가 만든 것들은 아주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이 모든 이야기는 소설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내 버킷리스트에는 늘 소설책 내기가 있었다. 쓰고 싶다고 생각했던 이야기들을 머릿속에서 끄집어내 책으로 만들었다. 누군가가 읽어주었고, 좋다고 말해주는 사람도 더러 있었다. 그 다음 소설도 썼고, 그 다음도 쓰고 있다. 꽤 좋은 성과들도 이루었다. 그래서 충분하냐고. 아니, 절대 절대 충분할리가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맨날 질투에 눈이 멀어 있는 건 아니다. 세상에서 제일 디자인을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것도, 물론 아니다. 한 가지 확실한 건 꿈이라는 단어의 문장은 절대 ‘이룬다’로 끝나지 않는다는 거다. 무언가를 이룬것 같으면 또 다음 목표, 그 다음 목표가 생겨난다. 끝도 없을 뿐더러 언제나 진행형이다.
그래서 행복한 것도 같다. 그 안에서 의미를 찾을 땐 환호성을 지르기도 한다. 매일의 과정으로 살아가고, 또 다음 과정에 기꺼이 뛰어든다. 나는 아마 평생 배가 아플 것이다.